얼마 전 인문학관련 전문출판사인 이제이북스에서 원전 번역으로 만나는 <니코마코스윤리학>이 출판되었다. 그 책의 번역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들인 세 명의 교수들로 정암학당에서 함께 강독을 한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 박사다. 이 책은 중역이 아닌 최초의 원전 공동번역이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철학자가 논한 윤리학이니 그들이 노력한 대가만큼 접근이 쉽거나 일반 독자들에게 친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원전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가독율을 높이는데 신경을 써 초벌번역을 놓고 수차례 치열한 토론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과정과 합의를 통해 원칙을 정하고 철학적 용어 표현의 문제들을 조율했기에 책을 읽으며 어휘에서 신선한 느낌과 더불어 그동안 익숙했던 표현들과 다른 용어들의 생소함이 느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아버지 역시 니코마코스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년에 얻은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주는 철학적 잠언격인 품성에 관한 도덕적인 논의들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가치관이 혼탁한 세상에 진정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이 물려주어야 할 재산은 바로 자신을 잘 추스르며 살 수 있는 도덕성과 윤리의식 그리고 자족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고자 한 철학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아무튼 이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부터 ‘윤리학’이라는 분야가 철학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윤리학에 관한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고 전해진다. <니코마코스윤리학>은 전 10권으로 1권의 '좋음과 목적을 시작으로 10권 '즐거움'이라는 행복에 대한 성찰과 정리로 끝맺음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그리스 문명이 지닌 도덕적 세계관을 폴리스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윤리나 도덕은 이론이 아니라 개인 삶의 실천 덕목이면서 공동체적 삶에 이로운 것이어야 하며 특별히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품성을 가꾸어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들을 특별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은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삶을 선택함으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의 모습을 보이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나 실천적인 사람은 명예를 선택한다. 하지만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또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또 그들의 탁월성을 근거로 명예를 얻고자 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들에게는 탁월성이 명예 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한 ‘탁월성’이란 생소한 용어는 선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아우르는 용어인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판단에 따른 중용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보았다. 특히 정치적인 삶에서 취할 선, 정의, 분배의 문제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한번쯤 되짚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행위는 품성을 만드는 지배적 도구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성(orthos logos)에 따라 행위 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의 견해이다. 성격은 습관적 행위의 모자람이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파괴된다. 탁월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일이든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비겁자가 되고, 무슨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뛰어들면 무모한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즐거움을 탐닉하면 무절제한 사람이, 즐거움을 전부 회피하면 목석같은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위 인용문에서 말한 것과 같이 좋은 품성은 좋은 습관에서 형성되며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병행되어야 함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접근이나 이해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천천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주고자 했던 윤리적인 행복의 실체와 자신이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행복감이 온몸을 감싸 안는 기쁨을 맛 볼 것이다.
학문의 공동연구와 원전 번역이라는 작업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잘 알 것이다. 더군다나 논리와 추론 사고를 중요시하는 철학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10여 년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강독해 낸 우직한 소장파 학자들이 지난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선>을 시작으로 그간의 결과물들을 단계별로 선보이기 시작한다.
올해는 원전으로 번역된 플라톤 전집물 간행의 첫 시발점인 <뤼시스>와 <크리아티스>도 선보인다. 역자들과 출판사측은 논술고사를 치러야 하는 학생들이나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최대한 쉬운 번역 문고판으로 제작하려 하고, 일반인들이 철학에 더 친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들의 계획은 플라톤 전집의 원전 완간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 원전 완간을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들의 우직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일반 독자들도 흔쾌히 집어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서로의 행복감이 배가되지 않을 런지.
덧붙이는 글 |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이제이북스/1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