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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여러 언론매체 등을 통하여 '공학인증'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의 많은 대학에서는 공학인증을 준비·유지하기 위한 조직을 경쟁적으로 구성, 운영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에서는 한국공학인증원의 공학인증 여부를 입사지원자의 면접점수에 포함시킨다는 이야기도 언론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참고로 한국공학인증원의 2대 이사장이 삼성전자 부회장입니다)

하지만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공학인증에 관한 기사는 많이 과장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학인증'이란 무엇인가

먼저 '공학인증'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미국의 공학인증원(ABET)는 1932년에 설립되어 공학교육 프로그램의 인증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인증제도란 특정한 공과대학의 교육과정(정확하게는 특정한 공학 프로그램)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에 부합 하는 정도로 적절한 기술·지식 교육을 제공하는지를 평가하여 인증(혹은 불인증)을 하는 개념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미국 공학인증원은 비영리법인으로서 공식적인 정부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학인증원의 인증, 불인증 여부는 미국 내의 다른 기관인 기업체, 학교 등에 아무런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한국적 의미에서의 교육부가 없으므로) 누구든지 별다른 제약이 없이 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수준차가 너무나 크고, 이러한 차이를 권위 있는 어떠한 기관이 합리적으로 평가해 줄 사회적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직원을 채용하는 고용주나 대학원 석박사 과정 학생을 선발하는 교수는 지원자가 정말로 (제대로 된) 대학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정부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공학인증원의 인증 여부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대학교육의 운영이 정부기관에 의하여 많은 간섭을 받고 있는 국가 (아마도 한국도 포함되겠지요), 혹은 대학에 많은 재량권이 있지만 대학의 발전수준이 충분히 높고 대학의 평준화가 대부분 이루어져 있는 국가(독일, 프랑스 등)의 경우에는 미국과 같은 인증기관의 필요성이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한국공학인증원(Abeek)은 1999년에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이사장은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맡았고, 초대 원장은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현 과학기술부 장관)이 맡았습니다. 한국공학인증원도 역시 정부기관이 아닌 사단법인이며, 다른 나라의 인증기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과장해 보도하는 '공학인증'은?

그럼 이제부터 언론에서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Washington Accord(위싱턴 협약, 이하 WA)라는 것은 여러 국가에 있는 인증기관들 사이에서 서로 인증기준, 인증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전제로 서로 '상대방의 인증'을 신뢰하겠다는 의미의 협약입니다.

따라서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이 WA에 가입한다"는 표현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WA는 단지 법인들 사이에서의 협약입니다. 마치 글쓴이가 UN에 가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까지 WA에 단지 10개국(미국,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영국, 호주, 아일랜드, 홍콩, 싱가폴, 뉴질랜드, 일본)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는 일본(2005년 가입)이며, 대학교육이 평균화되어 있는 수많은 유럽국가 중에서는 영국과 아일랜드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의 경우에도 국제적인 지명도가 매우 높은 많은 대학들이 인증에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기관도 아니고 국제적인 기관도 아닌 일개 법인의 인증을 받아서 달라질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한국이 WA에 가입하면 한국의 공학교육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WA에 가입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사단법인'입니다. 그리고 법인의 인증 여부는 해당 법인이 소속된 국가 내부의 기관, 대학, 회사에게도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A라는 국가의 공학인증원에서 인증을 받은 프로그램 과정을 졸업한 사람의 공학적 능력을, B라는 국가의 특정한 공공기관, 대학, 회사가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WA와 아무런 (원칙적인) 상관이 없고 해당 기관의 고유권한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A, B 국가의 두 인증원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역시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WA의 가입 여부가 한국에서 대학과정을 마친 사람이 해외에서 취업할 가능성을 높여줄까요? 이것을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WA에 가입한 인증원이 있는 국가의 구인·구직 사이트에 가서 Accreditation(인증) 혹은 WA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글쓴이의 개인적 경험으로는 WA에 가입한 영국, 호주의 대학에서 일자리를 찾던 5년의 기간 동안 그러한 단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또 글쓴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WA에 참여할 인증기관이 없는 유럽국가에서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대학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미국에서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인증 여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 역시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공학인증 제도 자체의 긍정적인 기능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언론에서 터무니없이 부풀려서 이야기하고, 또 국내의 많은 대학들이 마치 하나의 유행처럼 따라가는 현재의 상황은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달려가기 위해서는 먼저 고개를 들어서 앞에 뭐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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