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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부터 15일까지 전라남도 나주에서 "호남 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전국역사교사모임 겨울자주연수가 열렸다. 전남의 역사 선생님들이 중심이 되어 1년 남짓 준비한 이 연수는 낮에는 영산강 주변의 삶의 흔적을 답사하고 밤에는 수업 사례 발표와 초청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전국 150여 명의 역사 선생님들이 3박 4일간 함께 한 연수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다. - 필자 주

천년 고도, 목사골 나주

나주 터미널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니 집결지인 나주목 문화관이 저만치 보였다. 점심을 나주 대표 먹거리인 국밥으로 먹고 나주목 문화관에서 전남 선생님들의 따뜻한 안내를 받으며 문화관 안에서 나주에 대한 개략적인 눈 공부를 하였다.

눈에 띄는 것은 '천년 고도 나주'라는 푯말이었다. 나주가 어떻게 옛 수도란 말인가? 좀 생소한 말이었다. 전라도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 (좌)완사천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왕건과 장화왕후의 동상. (우)동상 밑의 수도꼭지를 밟으면 지하 130미터에서 끌어올린 시원한 물이 사진처럼 쏟아진다. 정수된 물이어서 먹어도 된다.
ⓒ 최장문
▲ 왕건이 탐낸 쌀. 나주 특산물 중의 하나로 2005년 전국 최우수 브랜드 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 최장문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나주가 금성이라 불릴 적에 후고구려의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군사 3000여명을 이끌고 영산강을 타고 들어와 이 지역의 지방세력인 오다련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의 후방지역인 금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고려 개국전 왕건이 나주에서 활동할 때 오씨부인(오다린의 딸. 훗날 장화왕후)을 만나 물을 청하자 장군이 급하게 물을 먹다 체할 것을 걱정하여 물그릇에 버들잎을 띄워줬다. 이것을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고려 2대왕 혜종이다.

이때부터 나주는 임금을 배출한 지역으로 '중앙'과 연결됐다는 자부심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도 전라도 53고을이 모두 농민군의 손에 떨어졌을 때도 나주만은 국가의 편에 서서 굳게 성을 지켜내었다. 이처럼 나주는 고려 성종 때 목(牧)으로 승격되어 일제시대 전까지 1000여 년 간 중앙과 연결된 지역으로, 동시에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 금성 토평비.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나주 읍성을 지켜낸 사실을 적은 비석이다. 당시 사람들의 입에서는 ‘양호가 무너지고 호서에는 오직 홍주(홍성)만이 남고, 호남에는 나주만이 남아 성을 지키며 함락되지 않아 53주에는 하나만 푸른 이파리 같다’는 민요가 불려졌다고 한다.
ⓒ 최장문
나주시에서는 2000년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역사문화 관광도시 건설을 목표로 최근 금성관 (객사)주변정비, 나주 읍성 복원, 나주 향교 동·서재 복원사업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2006년 영산강 문화축제 시작과 함께 천년 세월 동안 호남의 중심이었던 나주목을 재조명하고 행정단위인 목(牧)의 역사는 물론 목으로서의 나주 구심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나주목의 중심에 있던 동사무소를 이전하고 그곳을 개조, 문화관을 설치하여 2006년 가을에 개관한 상태였다.

▲ 교사들 뒤편으로 나주목 문화관이 보인다.
ⓒ 최장문
전시관 내부에는 '어향(御鄕) 나주 목이 되다', '나주 목사 부임 행차', '나주 읍성 둘러보기', '관아 둘러보기', '다시 태어나는 나주'라는 주제로 분류되어 있으며, 천년고도 목사 고을 나주가 태어나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었다.

금성산 자락에 천년 고을 나주목

금성산은 나주의 진산(鎭山. 고을을 보호해주고 정기를 주는 산으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으며 흔히 학교 교가에 많이 들어가 있다)으로 예부터 영산강과 함께 나주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나주는 금성산을 등지고 영산강을 두르고 있어 읍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다"고 나와 있다.

왕건이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을 때의 지명이 '금성'이었던 것도 금성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금성산 품안에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큰 객사가 있었다.

객사란 고려~조선 시대 때 지방 궁실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 '闕'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들과 선비들이 모여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예를 올리던 곳이다.

▲ 나주목의 객사, 금성관(錦城館)
ⓒ 최장문
▲ 나주목사내아(內衙). 나주목사의 관사라고 할 수 있는 건물로 전국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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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객사에서 나주목 문화관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나주 향교가 나온다. 향교의 공간구성은 대체로 서울의 성균관과 비슷하다. 즉 공부하는 '명륜당'은 경전학업의 중심지로, 제사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는 천여 년 간 목사골이었기에 유림들이 많았고 이런 이유로 나주향교의 규모도 성균관 다음으로 컸다고 한다. 그렇다면 향교에서 제사의 공간인 대성전과 교육의 공간인 명륜당 중 어느 쪽이 상위 공간일까?

충·효·열(忠孝烈) 정신에 입각한 유교에서는 당연히 대성전이다. 그래서 보통 향교의 공간배치에 있어서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지형상 낮은 곳인 앞쪽에 명륜당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경관이 조성되었다. 대전의 경우에도 회덕향교와 진잠향교 모두 전학후묘의 경관이다.

그러나 나주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그 뒤에 명륜당이 있다. 왜 그럴까? 평지이기 때문에 뒤에 있으면 안보이고 막힌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앞쪽이 상위 개념이 되어 전묘후학(전묘후학)의 경관으로 향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떤 불변의 원칙일지라도 생활 속의 공간과 어우러져야 더욱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 뒤 쪽에서 바라본 나주 향교. 중앙에 대성전, 양쪽에 기숙사였던 동·서재가 보인다.
ⓒ 최장문
▲ 최근에 고증을 통해 복원한 동재. 천년 목사고을이란 말처럼 규모가 매우 큰 것 같았다. 또한 한국 목재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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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첫날, '나주'하면 막연하게 '나주배'라고 공식처럼 떠올랐던 도시가 새롭게 다가온다. 금성산 자락에서 펼쳐진 객사, 향교, 나주목사내아, 문화관 등을 통해 살아있는 나주 1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보는 듯했다.

오후 5시, 숙소로의 이동을 위해 나주시 문화공보과에서 협찬한 버스를 탔다. 버스 사방에는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주몽>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나주시가 천년 목사골이라는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 나주시 문화공보과 버스에 그려진 주몽 캐릭터.
ⓒ 최장문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영산강 유역의 아파트 고분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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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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