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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47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충주에 있는 외국인취업교육장에서였다. 이주노동자들이 국내에서 일하면서 겪을 수 있는 애로사항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교육을 하는 자리였다.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이 다가와서 대뜸 한다는 말이 "내가 당신을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살 때 만났던 사람인가 싶어, 먼저 출신 지역을 물어봤다. 그러자 그녀는 "2003년 12월 호텔 인도네시아에서 만났었고 당신 토론회에 참가했었는데 기억 안 나요?"라고 다시 물어왔다.
그제야 나는 기침과 고열로 일주일 내내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한 '아시아지역 이주노동자 연대회의'가 떠올랐다. 당시 한국에선 정부의 불법체류자 강제추방 정책에 두려움을 느끼던 스리랑카인 '다라카'의 자살 이후, 강제추방 반대와 합법화를 요구하는 이주노동자관련단체들의 농성이 매일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현실에 대한 보고와 함께 몇 가지 주제 발제 가운데 하나인 토론회 사회를 맡았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사람을 한두 명 봤던 것도 아니고, 만 3년이 더 지난 일을 기억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녀는 나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스리에요."
"그럼 이주노동자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었나요? 홍콩, 싱가포르, 대만?"
"호호. 아니요. NGO 스태프로 참석했었어요."
이주노동자가 된 NGO 활동가
전혀 뜻밖이었다. 당시 회의 주제 중의 하나는 이주노동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었고, 그런 방법을 토론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국내 송출과정의 비리와 해외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이주노동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 역시 내가 놀라는 이유를 이해하는 듯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싶어요. 이주노동이 문제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묻지도 않은 스리의 대답은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이주노동을 택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었다. 스리는 출국 전 혹은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상담 지원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했다. 원해서 하는 일이었지만, 미래를 준비할 만한 수입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이주노동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같은 뜻을 품고, 같은 운동을 하던 동지로서 만났던 이를 3년이 더 지나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으니 그 즐거움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진한 아쉬움과 섭섭함이 함께 전해져 왔던 것은 그녀의 현실적인 선택에 대한 부분이었다.
NGO 활동가에서 이주노동자가 되었다고 해서 스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향을 떠난 이가 자신은 아니더라도 친구들 중에 한두 명은 고향을 지켜주길 기대하는 심정이 있는 것처럼, 그녀가 그 자리를 계속 지켜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9년까지 연 1백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을 송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스리는 그러한 정부 정책에 호응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역군이 된 셈이었다. 아시아개발은행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해외 이주노동자(TKI)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2005년도에 29억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이제 해외에서 달러를 벌며 미래를 준비하는 이 중에 스리도 예외는 아니다. 부디 이주노동자의 한 사람이 된 스리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이주노동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