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두 달간 이라크 전비, 민간인 희생 3만
@BRI@지난 2003년 3월 이라크를 전격 공격한 이후로 미국은 직접적인 이라크 전쟁비용으로만 매일 3억 달러를 쓰고 있다(간접비용과 기회비용까지 따지면 일일 약 10억 달러). 부시가 구실로 내건 대량 살상무기는 이라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부시는 이라크 민주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동안 이라크 민간인 60만명이 전쟁의 여파로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매일 3억 달러를 이라크전에 퍼부어 날마다 450명의 이라크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있는 셈이다.
200억 달러는 우리 돈 약 19조원으로 올해 정부예산 중 수송, 교통, 지역 개발 등에 쓰이는 SOC(사회간접자본) 예산 18조 2천억원과 비슷한 규모다. 결코 적지 않은 돈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전쟁 씀씀이로는 고작 66일분에 불과하다. 위 셈법을 적용하면 미국이 200억 달러를 간단히 날릴 66일 사이에 이라크 민간인 3만명이 또 애꿎게 죽어나간다.
이번엔 남미로 눈을 돌려보자. 같은 돈 200억 달러의 전혀 다른 쓰임새를 볼 수 있다. 지난달 19일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정상회담에서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오래전부터 제기해온 총연장 8천km의 남미대륙 종단 가스관 공사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서울-부산 간 거리의 약 20배인 가스관은 베네수엘라에서 출발하여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까지 이어진다. 차베스가 제안한 대륙 종단 가스관은 남미 국가들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도 크지만 남미 국가들의 반미 연대와 지역 협력의 상징으로 더욱 주목받는다. 이 대륙 종단 가스관 건설 예산이 200억 달러다.
1992년 멕시코, 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미국은 1994년 34개 국가 정상을 마이애미에 불러모아 쿠바를 제외한 전체 미주대륙을 단일한 시장으로 편재한다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 계획을 발표했다. 마이애미 선언문에서는 2005년까지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모두 끝낸다는 구체적 시한 목표까지 제시했다.
그런데 2005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미국이 클린턴 정부 때 시작하여 이미 10년 넘게 공을 들인 마이애미 구상은 목표 시점인 2005년 11월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FTAA 정상회담에서 결정적 암초에 부딪힌다. 'FTAA를 땅에 묻어버릴 삽을 가지고 왔다'며 정면으로 도전한 차베스 때문이었다. 차베스와 그에 동조하는 남미 좌파 국가들의 반대로 부시는 정상회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그러진 얼굴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야 했다.
연이은 카운터 펀치가 차베스의 남미대륙 종단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다. 대륙 종단 가스관은 반FTAA의 상징이자 남미인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새로운 지역 협력과 공동 발전을 모색하는 희망의 프로젝트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건설 재원 200억 달러는 현재 남미 경제 수준에서는 매우 막대한 규모다. 그러나 남미대륙 협력을 위해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인 차베스와,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강력하게 필요로 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각각 남미 국가 가운데 경제력 1, 2위임을 고려한다면 결국 재원 조달의 관문도 돌파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라는 밑 빠진 독에 겨우 66일 동안 뿌려댈 전쟁 비용, 그 결과 3만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게 될 비용으로 3억 6천만 남미인들은 거대한 희망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2세기에 걸친 먼로주의 붕괴의 서막
물론 미국의 FTAA 계획이 가스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어긋난 것은 아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 바탕에는 20년간 이어진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중남미인들의 분노와 실망이 짙게 깔려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난 20년은 군부독재라는 늑대를 피했으나 경제독재라는 더 무서운 호랑이를 만난 세월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결과 라틴아메리카 5억 5천만 인구 가운데 2억 2천만명이 빈곤층이 되었다.
주요한 자원과 국영기업들은 대부분 미국 등 국제 거대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부의 편중과 사회 양극화는 극심해졌으며 지역 경제는 자생성을 잃고 신음했다. '버림받은 자보다 더 슬픈 것은 잊혀진 자'라고 했던가. 한 저명한 학자는 중남미의 이런 현실을 '잊혀진 대륙'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미국으로 인한 라틴아메리카 수난의 역사는 유장하다. 1823년 미국의 제5대 대통령 J. 먼로가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 즉 미국이 유럽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 것이며 식민지를 건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른바 먼로 선언 이래 장장 2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뒷마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뒷마당이란 무엇인가. 주인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외부인은 일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 은밀한 후원이다. 미국은 중남미 각국의 정부를 입맛대로 갈아치웠고 이 지역의 경제 실권을 장악했으며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제도를 미국식으로 길들였다.
미국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퍼뜨리려는 대부분의 제도나 계획들을 먼저 중남미에서 실험한 뒤 아메리카 대륙 바깥으로 확산했다. 신자유주의가 또한 그러했다. 80년대에 중남미를 샘플로 IMF 프로그램은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이는 1997년 동남아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된 바 있다.
야구선수 꿈꾸던 차베스의 멋진 만루홈런
1998년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대통령 당선을 기점으로 중남미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거센 도전을 시작한다. 중남미 각국에서 그 이전까지 신자유주의를 이끌거나 대변했던 기성 정당들을 뒤로 물러 앉히고 반신자유주의 정권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중남미 좌파 도미노는 계속 이어져 현재 중남미 국가 가운데 인구나 경제적 영향력이 미미한 콜롬비아, 파라과이, 파나마, 코스타리카, 수리남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 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특히 남미 대륙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브라질(룰라 다 실바), 아르헨티나(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칠레(미첼레 바첼레트), 페루(알란 가르시아), 우루과이(타바레 바스케스)를 모두 중도좌파 정권이 이끌고 있다.
중남미의 좌파 현상은 최근 더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수립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정권은 반미 반신자유주의 성향이 앞의 국가들보다 훨씬 세며 이 가운데 모랄레스 대통령과 코레아 대통령은 차베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제헌의회를 소집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구체제를 청산하는 베네수엘라 노선을 그대로 따르는 상황이다.
2006년에 치러진 잇따른 선거에서 반신자유주의 좌파 정권이 연승을 거두며 반미 벨트가 강화되는 것을 두고 차베스는 "룰라 대통령이 1루 진출(재선), 오르테가가 2루, 코레아 대통령이 3루에 진출했는데 이제 내가 12월 3일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미국을 향해) 만루 홈런을 날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소년 시절 야구선수를 꿈꾸었던 차베스의 호언은 지난 연말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멋지게 실현되었다.
상대국의 환경, 문화, 민중적 삶을 지원하는 무역협정
좌파 정권들이 들어섰다고 해서 200년 동안 똬리를 튼 친미 질서를 넘어 중남미 지역 협력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중심에 서야 하며, 각 나라가 서로 이해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지역 통합의 정신적 동력이 될 사상과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쉽지 않은 깃발을 치켜든 인물은 우고 차베스다. 차베스는 중남미인들에게 익숙한 200년 전 남미 독립투쟁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중남미 통합 없이 중남미의 미래는 없다"는 이상을 제시했다. 이는 또한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이 지난 반세기 동안 제기한 슬로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역대 지도자도 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차베스는 시몬 볼리바르의 지역 통합 이념을 현실에서 보다 명쾌하고 참신한 지역 협력 프로그램으로 구체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현재 그가 추진하고 있는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 Alternativa Bolivariana para América Latina y el Caribe, 이하 ALBA로 표기) 구상이다.
차베스가 제안한 ALBA는 기존의 지역 경제 공동체들과 발상 자체부터 다르다. 일반적 지역 통합 협정의 경우, 관세를 없애고 교역 확산에 초점을 맞추며 국가간 상품, 서비스, 자본 이동을 중시한다. 역내 교역은 증가하나 그 혜택은 일차적으로 기업과 자본, 무엇보다 경제력 우위의 국가에 집중된다.
그러나 ALBA는 지역 내 각 나라 민중 삶의 조건에 뿌리를 두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발상에 기초한다. 민중 생존권 보호와 발전을 위한 협력이 전제되며 각 국가의 국내 산업 진흥과 국내 시장의 민감한 영역의 보호를 인정한다. 차베스의 ALBA 대안에 입각해 베네수엘라와 쿠바, 볼리비아 3개국이 2006년 4월 체결한 민중무역협정(TCP)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협정의 구체 조항들을 통해 3개국은 상호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쿠바는 중남미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수준 높은 쿠바 의사들과 교육자들을 볼리비아에 보내 가난한 민중의 의료를 돕고 주민 교육도 담당한다. 베네수엘라는 볼리비아의 에너지와 광업 개발을 지원하며 장학생 5천명을 선발하여 교육하고 볼리비아의 생산 및 연관 기반시설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 1억 달러를 조성한다. 또 TCP 협정을 통해 볼리비아는 콜롬비아와 미국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때문에 수출이 격감한 콩을 비롯한 볼리비아 농산물을 나머지 두 국가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볼리비아는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필요로 하는 광물, 농산물, 농가공품, 공산품 수출에 기여하며 양국의 에너지 안보를 지원하고 (중남미)원주민 연구 전문화에 기여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4대 선결조건의 무조건 수용을 요구하며 시작된 한미FTA와 너무도 대조되는 무역협정이 아닌가. 결국 '무역협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맺는 '어떤' 무역협정인가가 관건이다. 샘물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독사가 마시느냐 산양이 마시느냐가 핵심인 것처럼.
미국 없는 중남미의 홀로서기는 가능하다
ALBA 구상은 그 자체로 이미 중남미 여러 나라의 정상들과 민중들의 호감과 존중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이 전체 중남미에 적용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과 각 국가들 간의 조율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이 지역의 맹주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미국의 부단한 자유무역협정 기도는 여전히 넘어야 할 험한 산이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차베스는 중남미 국가들에 일괄적으로 ALBA를 강요하지 않는다. 상대국들의 형편과 중남미에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복잡한 경제블록별로 대응이 유연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진도가 빠른 쿠바, 볼리비아 등과는 이미 민중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최근에는 니카라과와 에콰도르가 민중무역협정을 포함한 ALBA 대안에 적극 합류할 뜻을 밝히고 있다. 차베스는 카리브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제공하면서 ALBA 정신에 입각한 지역 협력, 국가간 협력 사례를 먼저 실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차베스는 단순한 경제 블록에 머물던 메르코수르의 변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중남미 국가들의 금융시장 독립을 위해 남미은행 창설을 제안하면서 베네수엘라는 이를 위해 1차적으로 40억 달러를 출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적극 찬성하면서 IMF를 대체할 남미은행 설립이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반면 차베스는 미국에 동조해 나가는 움직임에는 단호하다. 베네수엘라는 오래 전부터 안데스공동체 가입국이었으나 가맹국인 콜롬비아와 페루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자 곧바로 안데스공동체를 탈퇴해버렸다. 이로 인해 미국의 입김이 강하던 안데스공동체는 한층 쪼그라들었다.
참여정부의 허브론은 왜 피어보지도 못 했을까
2005년 7월 24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는 '남미판 알자지라(Al Jazeera)' 방송인 <텔레수르>(남쪽의 텔레비전; Televisora del Sur, 혹은 Telesur)가 첫 방송을 시작했다. 텔레수르는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브라질과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협정을 맺어 설립한 최초의 중남미 위성방송국 합병 회사다. 미국 문화가 판치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중남미 자체의 방송을 키우려고 세운 ALBA 구상의 미디어적 실천이다.
차베스는 지역 공통의 지식인 양성을 위해 '남부 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설립도 검토하고 있다. 이처럼 ALBA 구상은 국가간 정상회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직접 이 지역 민중들의 삶과 문화를 개선하면서 호소하는 차베스의 지역 공동체 구상이 5억 5천만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 한국을 동북아 물류허브, 금융허브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한민국의 동아시아 지정학적 위치에서 당연히 꿈꿀 수 있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무런 진전도 주변국의 호응도 없는 한낱 구호와 도상 연습으로 끝나가고 있다.
동북아의 허브는 고사하고 한반도의 북쪽조차 끌어안고 함께 협력하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반쪽짜리 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는 상생과 발전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경쟁 구도로 비쳤다. 홍콩, 싱가포르, 중국 등의 코웃음이 그것이다.
서로 혜택을 나누고 어려움을 지원하며 각국의 환경과 문화, 경제적 조건, 국민의 삶의 조건을 배려하는 정신과 실천이 빠진 지역 경제론, 지역 공동체론이 성립 가능한 시대일까? 중남미가 이미 선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아무리 막강한 물리력과 경제력을 지닌 나라가 주도해도 그런 지역 공동체는 가능하지 않다.
미국과의 FTA 체결만이 살 길이고 이에 반대하면 개방 반대론자, 쇄국론자라고 딱지를 붙여버리는 노무현 정권이야말로 국제 협력과 교류를 너무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한 나라의 정권을 제 맘대로 갈아치우기 위해 하루 3억 달러를 퍼부을 수 있는 미국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을지 모르나 세계인들은 그 광포한 질서에서 벗어날 길을 서서히 모색해 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시간이 갈수록 대세로 자리잡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한우림 기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