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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 황하 제1교는 황하에 놓인 수백 개의 다리 중 가장 먼저 세워진 철교이다. 당시 청해성과 신강지구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로 동서교통의 핵이었다.(사진 아래) 황하 제1교 아래에 양가죽 뗏목. 양의 머리와 네 발목을 떼어낸 통가죽에 공기를 넣어 부력을 얻는다.
ⓒ 조수영
란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탑산 공원(白塔山公園: 바이타산공유엔)

시내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백탑산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은 언덕 위에 지어진 백탑사와 백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황하를 따라 상류로 가다가 황하 제1교를 건너면 오를 수 있다.

황하 제1교는 황하에 놓인 수백 개의 다리 중 가장 먼저 세워진 철교이다. 이 철교는 프랑스인이 설계한 다리로 당시 청해성과 신강지구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로 동서교통의 핵이었다고 한다.

@BRI@더운 날씨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갈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백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니 란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황하 제1교 아래로 누런 황하가 흐르고 있다.

사원의 중심에 백탑산 공원의 상징물인 백탑이 있었다. 기단은 8각을 3층으로 쌓았는데 연꽃무늬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의 아랫부분이 둥근 항아리 모양으로 된 것은 티베트의 불탑양식이고, 그 위에 7층 8면의 탑 형태는 중국의 불탑양식이다. 서로 다른 두 양식을 혼합한 퓨전 건축 형태인 것이다. 각 층의 각 면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모서리에는 방울을 달았다.

백탑산 공원의 백탑의 유래는 이러하다. 칭기즈칸이 전국을 통일하기 바로 직전에 티베트 불교의 법왕에게 불법을 청하자 법력이 뛰어난 승려를 몽골로 보냈다. 이때 란주에 이른 승려가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원나라는 이곳에 기념탑을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시기에 현존하는 백탑의 형태로 중건되었고, 청나라 강희제 때 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백탑 뒤에 있는 사원 또한 겉모습은 중국식이지만 그 안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대부분은 라마승이라 한다.

이밖에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상피북과 청동종 등도 볼 수 있다. 처음에 이곳은 높은 곳에서 란주를 방위하는 요새로 만들어졌으나, 지금 백탑 주변은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내에는 관광객보다 여가를 즐기려는 란주 시민들로 북적였다.

▲ (사진 왼쪽) 백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백탑산 공원 (사진 오른쪽) 백탑의 아래쪽은 티베트의 불탑 건축양식을, 위쪽은 중국식 탑 양식을 사용했다.
ⓒ 조수영
▲ (사진 위) 란주에 오면 반드시 먹어봐야 한다는 우육면 (사진 아래) 음식을 파는 곳 중에 청진(淸嗔)이라 쓰인 곳이 많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만큼 이곳의 음식들은 돼지고기를 일체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 조수영
저녁으로 란주에 오면 꼭 맛보라는 우육면을 먹었다. 소고기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다. 시원하고 얼큰한 맛이라는데 내 입맛에는 느끼하고 누린 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고추장까지 뿌려 먹었는데도 영 시원치가 않다.

가욕관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란주역으로 갔다. 역 앞 광장에는 천리마상이 있는데 날아가는 제비를 뒷발로 밟고 달리는 모습이다. 란주 시내에 있는 감숙성 박물관의 동분마(銅奔馬)를 본뜬 것이다.

동분마는 한나라 장군의 분묘에서 발굴된 것으로 실제는 길이 45cm, 높이 34.5cm의 크기의 청동상이다. 일명 '마도비연(馬跳飛燕)' 또는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을 나는 제비보다 더 빨리 달리는 한혈마 또는 천리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 란주역. 광장에는 제비를 밟고 있는 천리마상이 있다.
ⓒ 조수영
처음 타보는 중국의 침대 열차

란주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까지의 거리는 754km인데, 열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란주역에는 침대칸 전용 대기실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충전도 하고 넓은 의자에서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깨끗한 화장실도 따로 구비되어 있어 모두 씻고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열차에서는 씻는 것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수도 하고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러나 열차에 타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화장실보다 더 좋은 세면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객실용 슬리퍼도 있었다.

중국의 열차 좌석은 네 종류로 나누어진다. 가장 싼 가격으로 딱딱한 좌석인 잉쭈어(硬座)에서는 4명 또는 6명이 마주보고 가는데 의자를 뒤로 젖힐 수 없게 되어 있다. 부드러운 의자인 루안쭈어(軟座)는 우리나라 무궁화호와 비슷한 것 같다.

침대칸으로는 딱딱한 잉워(硬臥)와 편안한 루안워(軟臥)가 있다. 잉워는 6인 1실로 되어 있는데 각 칸은 칸막이는 있으나 문이 없어 복도에 드러나 있다. 이름은 딱딱한 침대지만 보통 수준의 쿠션이 깔려있다.

우리는 4가지의 좌석 중 가장 비싸다는 4인 1실의 루안워를 탔다. 창가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층 침대 2개가 마주보고 있다. 깨끗한 시트와 이불, 베개, 보온병, 슬리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6인실과 달리 칸마다 문이 있어 안전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복도에는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어 항상 차를 마시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말해준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9시간의 기차여행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 4인 1실의 루안워는 칸마다 문이 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층 침대가 마주보고 있다. 복도에는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어 항상 차를 마시는 중국인들의 생활을 말해준다.
ⓒ 조수영
하서주랑을 지나다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가는 열차는 오른쪽엔 고비사막을, 왼쪽으로는 만년설의 기련산맥(祁蓮山脈: 치롄산맥)을 끼고 달린다.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시작이다. 중원에서 서역으로 갈 때나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올 때 이곳 이외에는 길이 없다. 하서란 황하의 서쪽을 뜻하는 것이고, 주랑은 복도를 의미한 것이다. 재미있는 이름이다.

이 긴 복도는 무려 800km에 이른다. 또 말이 복도지 그 폭도 무려 40∼100km 이상 된다. 감숙성의 기다란 모양과 일치한다. 기련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복도를 일본인들은 좁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불렀다.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를 지나간다. 그러나 늦은 밤 출발한 열차의 창밖은 암흑뿐이었다.

▲ 서역으로 유일한 길, 하서주랑. 오른쪽엔 고비사막을, 왼쪽으로는 만년설의 기련산맥(치롄산맥)을 끼고 달린다. (직접 그림)
ⓒ 조수영

실크로드와 한혈마(汗血馬)

옛날 서역에 대완이란 나라가 있었다.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었다. <사기>에는 대완국에 좋은 말이 많은데, 그 중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는 천마의 후손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나라에는 하늘에 닿는 높은 산이 있어 그 위에 천마가 내려와 논다. 그런데 이를 잡을 수가 없어 산 아래 오색 암말을 방목하여 암내를 피우면 이 천마가 내려와 교배를 하여 새끼를 낳았고, 그것이 한혈마, 천마의 자식이라 천마자라고도 부른다 했다.

실제 이곳에서 방목 되는 말들은 현재에도 체구가 크고 온몸이 주로 검붉은 색이다. 여타 지역의 말들에 비해 힘이 있어 빠르고 오래 달린다고 정평이 나 있다.

한혈마가 피땀을 흘리는 까닭은?

피땀을 흘린다는 기록의 근거는 말들은 주로 발목 부근과 어깨뼈 근처에 기생충이 서식하는데 전속력으로 달릴 때 급속하게 혈관이 팽창하고 그로 인해 사람의 모공과 같은 부분이 부풀어 올라 땀이 배출하면서 기생충이 서식하는 곳에서 피가 약간 섞여서 나온다는데 있다.

또 단순히 흘리는 땀이 검붉은 피부색에 의해 언뜻 피처럼 보인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생각했다.

날쌘 말을 얻기 위한 한무제의 노력

한 무제의 말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천적인 흉노와 싸우는데 가장 큰 약점이 말이었기 때문이다. 장건이 서역을 개척하고 돌아와 올린 보고에서 한혈마의 존재를 들은 무제는 무척이나 기뻤다.

이후 날쌘 한혈마는 주된 교역물품이었지만, 실은 최상급의 한혈마는 한나라 사절의 눈에 들키지 않게 이사성에 숨겨 기르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한무제는 황금으로 말을 만들어 대완에 보내어 이사성의 한혈마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를 거절하자 자존심을 상한 한나라 사절은 그 황금마를 망치로 두드려 깨버리고 돌아왔다.

화가 난 무제는 이광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완 정벌을 시켰으나 실패하였다. 2차 원정군은 병력 6만 명에 말 3만 필의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살아 돌아온 병력은 겨우 1만 명에 불과했으나 순종 한혈마를 탈환해 오는 데는 성공했다.

이때 무제는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어 칭송했다. 한무제가 천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가를 다음의 시 한 편으로 알 수 있다.

천마가 오네 서극에서 오네
만리를 넘어 중국으로 오네
신령한 위엄을 이어받아 외국을 항복시키니
유사를 건너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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