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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함께 아들 저우하이잉을 안은 쉬광핑의 모습이다.
루쉰과 함께 아들 저우하이잉을 안은 쉬광핑의 모습이다. ⓒ 루쉰박물관
루쉰은 그가 25살 되던 1906년, 어머니가 맺어준 주안(朱安)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이 결혼은 어머니에 뜻에 따르는 명목상의 것이었을 뿐 실제적인 부부생활은 거의 없었다. 1925년 루쉰은 그의 제자 쉬광핑을 만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사랑의 공백 상태로 지낸 셈이다. 루쉰은 첫사랑이었던 친꾸(琴姑)를 잊지 못함과 무엇보다 원치 않는 결혼을 받아 들였다는 자괴감이 그 긴 시간 동안 사랑의 문을 닫아 두게 한 것으로 보인다.

1898년 2월 12일 광둥성(廣東) 판위(番禺)에서 출생한 쉬광핑은 1925년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재학 중에 루쉰의 강의를 맨 앞줄에 앉아 듣던 학생이었다. 루쉰을 존경하는 마음과 국민당의 탄압을 무릅쓰고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미래를 제시해 주던 성자적 모습의 루쉰에 매료되어 40대 중반의 그를 사랑하게 된다.

2년여 간의 서신왕래와 만남으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국민당의 탄압과 루쉰의 가족들을 피해 1927년 9월 상하이로 가서 그곳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인 1929년 9월, 아들 저우하이잉(周海嬰)을 낳는다.

국민당 체포령으로 자유롭지 못한 활동을 하던 루쉰으로서는 그의 부인이자 비서인 쉬광핑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쉬광핑은 루쉰에게 필요한 책과 생활필수품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루쉰의 원고를 정리하고 편집하는 등 루쉰 말기 10년 동안 루쉰 창작의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루쉰의 최후 10년의 창작성과는 그 전 20년의 창작성과를 넘어 서는데 그것은 쉬광핑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은 바 크다.

1936년 10월 19일 루쉰이 별세하자 쉬광핑은 루쉰의 유작을 정리하여 1937년에는 <야기(夜記)>, 1938년에는 <집외집습유(集外集拾遺)> 등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 후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600만 자에 달하는 <루쉰전집(魯迅全集)>를 편찬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현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인 루쉰의 미망인으로서 쉬광핑은 1949년 건국 이후 전국정치협의회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하며 제 1기 인민대표상임위원회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0년 10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68년 3월 3일 베이징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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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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