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상대로 한 대(大)도박에서 실패한 일본 제124대 히로히토 국왕(재위 1926~1989년)은 패전 이듬해인 1946년 1월 1일 연두조서를 발표하여 자신의 신격을 부정하고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함으로써(소위 ‘인간선언’) 일본 국민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1926년 12월 25일 즉위 당시 <서경>의 “백성소명, 협화만방”(百姓昭明, 協和萬邦 : 백성은 환히 빛나고, 만방과 화합한다)을 근거로 소화(昭和)라는 연호를 채택함으로써 국민의 평화와 인류의 공존공영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1945년 8월 15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그 모든 것은 일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1945년 패전 이후 히로히토의 운명과 일본 대외관계의 운명 사이에서 흥미로운 유사성이 발견된다. 다른 일왕들이 그러했듯이 히로히토는 신으로 자처했다가 그 ‘주제’를 인식하고 결국 인간임을 자인하게 되었다. 일본의 대외관계 역시 한때 ‘서양과 동급’임을 자처했다가 그 ‘주제’를 인식하고 결국 ‘서양의 하급’임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무쓰히토 국왕(혹은 메이지 국왕, 재위 1867~1912년)의 즉위 직후만 해도, 일본의 대외관계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외교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뀐 점이 있다면, 메이지 정부가 동아시아 변방국의 위상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중심국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적 방식으로 동아시아 중심국가가 되겠다’는 기조 하에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 청나라를 상대로 일종의 외교적 ‘도발’을 감행했다.
일본은 1869년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종래와 달리 자국 국왕을 황상(皇上)이라고 갑자기 격상시켰다. 그 이전까지 일본은 외교문서에서 자국 대표를 대군전하(大君殿下)라고 표기했었다. 조선측이 이 국서를 접수조차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속 좁음’ 때문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황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역내 외교관계를 교란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그 국서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선이 ‘협조’를 해주지 않자, 일본은 이번에는 청나라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청일수호조규(1871년)를 ‘양국 황제’의 명의로 체결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청일수호조규는 체결되었지만, 일본의 의도는 이번에도 좌절되고 말았다. 청일수호조규는 양국 황제 명의가 아닌 단순히 양국 명의로 체결되는 데에 그쳤다. 일본의 의도에 넘어갈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당시 중국의 실권자)이 아니었다.
위와 같이 외교문서나 조약을 통해 황제국가의 위상을 구축하려 했던 메이지 초기의 외교전략은 일단 실패하고 말았다. 두 사건을 통해 일본 지도부가 얻은 교훈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일본이 동아시아 중심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서양의 방식을 도입하지 않는 한 일본이 중심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이것이 바로 탈아외교(脫亞外交) 혹은 함포외교(艦砲外交)의 시작이었다. 동아시아(亞)의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脫) 서양의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탈아외교라고 불렸다. 책봉·조공 같은 방식이 아니라 함포 위협을 외교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함포외교라고도 불렸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양을 모방한 외교방식이었다.
탈아외교 도입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추세와 관련하여 중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조선·청나라·일본·유구(오키나와) 등은 본래 서세동점에서 동(東)의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탈아 즉 탈동(脫東)을 함으로써 일본은 서(西)의 입장으로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종래의 수세적 혹은 피침략적 입장에서 공세적 혹은 침략적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1871년 이후 일본이 취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원초적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탈아외교는 크게 3기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서 제2기 탈아외교를 크게 강화했다가 결국 제3기 탈아외교로 급선회한 인물이 바로 히로히토 국왕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탈아외교 제1기는 1871년부터 1894년까지다. 이 시기는 일본이 서양세력에 편승하여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동아시아를 침탈한 시기다. 대만침공(1874년)-운양호사건(1875년)-유구합병(1879년)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여기서 유구는 합병 이전 오키나와의 옛 이름이다. 이 시기의 특징을 들라면, 일본이 서양세력에 편승하여 동아시아를 침탈했을 뿐 서양세력과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양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탈아외교 제2기로 접어들어서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1894년부터 1945년까지를 망라하는 탈아외교 제2기에, 일본은 서양세력과 적극 경쟁하면서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동아시아 침탈을 강화하였다. 동아시아를 침탈했다는 점에서는 제1기와 다를 것이 없지만, 서양세력과 경쟁했다는 점에서 제1기와 차별성을 띤 시기였다.
청일전쟁(1894년) 이후 일본은 서양세력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서양세력과 적극 경쟁하면서 중국 등 대륙에 대한 침탈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년)-제1차대전(1914년)-만주사변(1931년)-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1년) 등의 과정에서 일본은 서양을 제치고 중국무대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 점은 중국무대에서의 세력판도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40년부터 1900년 전후까지 중국무대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의 ‘빅4’에 의해 지배되었다. 1902년 현재 중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총 15억 930만 달러였는데, 그중 일본자본은 5360만 달러로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중국무대에서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이런 일본이 1911년 전후에는 영국·프랑스·미국·독일·러시아와 함께 ‘빅6’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미국과 함께 ‘빅3’에, 만주사변 이후에는 미국과 함께 ‘빅2’에, 중일전쟁 이후에는 미국마저 제치고 ‘빅1’에 올랐다. 후발주자였던 일본이 서양의 강호들을 제치고 단시간에 중국무대에서 최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일본이 미국·영국 등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데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자신감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탈아외교에 한층 박차를 가한 인물이 바로 히로히토 국왕이었다. 이 점은 1927년 다나카 상주문(田中奏摺)의 채택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장래에 중국을 제압하고자 한다면 먼저 미국을 타도해야 하고, 중국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만주와 몽골(滿蒙)을 정복해야 하며,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중국을 정복해야 합니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나카 상주문의 채택을 계기로 일본은 대미 타도를 지향하는 한편 대(對)중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일본이 중국침략에 이어 미국에까지 싸움을 건 것은 바로 히로히토 때의 다나카 상주문 채택 이후의 일이었다. ‘서양 천하’를 ‘일본 천하’로 바꾸기 위해 서양 강호들과 한판 대결을 벌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탈아외교 제2기는 한때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중 두 민족의 항일전쟁과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히로히토는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황은 탈아외교 제3기로 접어든다. 1945년부터 현재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1945년 이후 일본은 서양세력에 편승하여 경제적 측면에서 동아시아를 침탈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제3기는 서양에 대한 태도가 ‘편승’이라는 점에서 제1기와 같고 제2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동아시아 침탈 방식이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1기 및 제2기와 다르다. 탈아외교의 강도가 한 단계 낮아진 것이다. 침탈 방식이 과거와 달리 경제적 측면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은 평화헌법 하에서 일본의 대외 침략이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금도 동아시아를 ‘침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본이 여전히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고 한국 등을 자국의 경제적 하청으로 두고 있으며 또한 미국의 동아시아 침탈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미국의 비호 하에 그리고 미국에 편승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위와 같이 히로히토 국왕의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는 탈아외교 제3기로 전환했으며, 이러한 구도 하에서 일본은 미국에 적극 편승하면서 동아시아 역내에서 자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최근 일본 내에서 ‘아시아로 돌아와야 한다’며 탈아외교 반성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본은 여전히 1871년 이후의 탈아외교 기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히로히토 국왕이 주된 전쟁상대였던 중국·한민족을 무시하고 미국에게만 항복을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본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한민족에게도 항복을 했다면, 일본은 탈아외교 기조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미국에게만 항복을 함으로써 탈아외교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히로히토 국왕은 일대 위기 속에서 대미 추종을 통해 탈아외교를 한 단계 낮추고 미국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중국·한민족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머리를 숙일 뻔한 치욕을 모면하고 일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인간선언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자존심은 버렸지만, 자기 조국의 ‘자존심’만은 끝내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 앞에서는 자존심을 굽혔지만, 동아시아 앞에서는 여전히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자존심 두 개는 버리고 자존심 하나는 지킨 셈이다.
야스쿠니·위안부·과거사·교과서 문제 등과 관련하여 한국·중국 등이 일본을 끊임없이 압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웃나라들에게 죄악을 저지른 일본이 미국의 비호 하에 이웃나라들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이 낳은 국제관계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