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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들은 독일 통일의 비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전공에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과정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학생이나 시민, 연구자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론은 별도로 하고, 19세기와 20세기의 독일이 각각 어떤 시점에서 통일을 달성했는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독일은 1871년과 1990년에 각각 통일을 성취하였다. 독일인들이 통일을 달성한 두 시점을 음미해봄으로써 통일에 관한 독일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BRI@19세기 세계 정치의 양대 산맥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남하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는 영국의 대결이 발칸반도·중앙아시아·동아시아를 무대로 세계적 범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크림전쟁 종전(1856년)과 제2차 아편전쟁 종전(1860년)을 계기로 영·러 양국은 상호 대결을 자제하고 내부 정비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세계 양대 최강의 대결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든 이 시기는 2선 국가들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미국·독일·일본 등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증강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세계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청나라가 1860년대부터 양무운동에 돌입하고, 조선이 1863년 이후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에 돌입한 것도 세계질서 이완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년)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호기를 활용하여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와 ‘헬무트 콜’
독일에서는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주(駐)프랑스 대사 비스마르크가 1862년에 재상으로 취임하여 통일을 향한 ‘고공행진’을 개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년)를 연달아 격파하고 1871년에 드디어 독일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말의 독일은 영-러의 패권대결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1860년 이후의 이완기를 활용하여 통일을 성취한 바 있다.
20세기말의 독일 통일도 유사한 국제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는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등장(1985년) 이후 미-소 대결이 이완되는 틈을 놓치지 않고 1990년 10월에 동서독을 통일하였다. 통일 이전에 헬무트 콜 총리가 포착한 것은 미-소 대결 이완기가 통일의 적기라는 점이다. 그와 독일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소수교(1990년), 북일 수교교섭 개시(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한중수교(1992년) 등도 이러한 국제질서의 이완을 반영한 것이었다. 종래의 냉전구도 하에서 서로 만나기 힘들었던 남·북, 한·소, 북·일, 한·중 등이 탈냉전의 호기를 이용하여 교섭을 적극 추진한 것이다.
1992년 2월 7일 체결된 유럽통합조약(마스트리히트조약)도 구소련 붕괴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활용한 유럽인들의 지혜의 산물이었다. 탈냉전의 혼란을 활용하여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을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탈냉전을 잘 활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통합은 외형상으로는 프랑스가 주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일이 주도하고 있다.
위와 같이, 19세기말에 국제질서 이완기를 활용하여 통일을 성취한 경험이 있었기에 독일인들은 20세기말의 질서 이완기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말의 경험이 20세기말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키운 셈이다.
역사적 안목 외에도 19세기말과 20세기말에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갖고 있었다는 점도 그들의 통일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 국민 역량의 총합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할지라도 전체 역량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부를 갖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힘은 모래알처럼 분산되고 말 것이다. 독일인들은 19세기말에는 통일지향적인 비스마르크 정부를, 20세기말에도 역시 통일지향적인 헬무트 콜 정부를 가짐으로써 자신들의 통일 역량을 효과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1990년 독일통일의 비결은 ▲19세기말에 유사한 국제환경 하에서 통일을 성취한 경험이 있다는 점 ▲1980년대 후반의 독일인들이 고르바쵸프 등장 이후의 미-소 대결 이완기를 통일의 적기로 포착했다는 점 ▲국민들의 역량을 통일로 결집시킬 만한 능력을 갖춘 헬무트 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흡수통일로 인해 오히려 더 곤란해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지만, 세계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비관론은 도리어 통일 독일에 대한 미국·영국·프랑스의 견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독일이 통일을 성취할 때 한민족은 뭘 했을까?
독일이 두 차례에 걸쳐 통일을 성취할 때에 한민족은 어떠했는가? 1863년 이후 흥선대원군이 국민통합을 위한 내부개혁을 추진했지만 흥선대원군 정부는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 채 결국 권력을 잃고 말았다. 당시의 과제가 통일은 아니었지만 19세기말의 한민족은 국제질서 이완기에 국가의 역량을 제대로 통합하지 못하여 결국 외세에 주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또 1990년대 전후의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시기의 한국 민중은 고도의 정치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기본적으로 통일 지향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정치적 역량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유능한 정부를 갖추지 못하였다.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독일뿐만 아니라 한민족에게도 통일의 기회였다. 하지만, 한민족은 19세기말과 1945년 이후의 국제질서 이완기를 한 번도 제대로 활용한 경험이 없었기에 1990년대 초반의 호기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역량이 결여된 무능하고 반역사적인 정권이었다. 당시의 한국 정부는 이완기를 활용하여 한소수교·한중수교 등을 성취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통일의 의지도 역량도 없는 정권이었다.
그에 반해 독일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말의 역사적 경험이 1990년대의 상황 대처에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지향적인 헬무트 콜 정부가 있었기에 세계 강국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1990년에 전격적으로 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2007년 들어 한반도에는 또다시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13 합의 이후 한반도에서는 북미평화협정 체결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등 통일에 필요한 기본 조건들이 하나씩 성취되고 있다. 그리고 2002년 촛불시위와 2004년 탄핵반대시위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 민중의 정치적 역량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 한국에 필요한 것은 독일의 경우처럼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선출하는 일일 것이다. 반민주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놓고도 엉뚱하게 그 반민주정권의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1987년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또 통일의 적기에 노태우 같은 무능하고 반역사적인 인물을 대통령으로 모셔 놓는 1990년대 초반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지금 눈앞에 다가오는 호기를 활용하여 오랜 숙원인 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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