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선거가 10개월도 남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맞서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나갔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요구 또한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우리에게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아직 각 정당들이 자기 후보를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연일 언론은 유력 후보들의 사진으로 넘쳐난다. 경부운하니 열차 페리니 혹은 한일해저터널이니 벌써부터 귀가 솔깃한 공약들도 인구에 회자된 지 이미 오래다.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 현직 물리학자이지만 나 또한 거대한 시대의 변화 한가운데 위치한 올 대선에 관심은 많은 편이다. 반세기가 넘는 냉전의 그늘이 드디어 한반도에서도 서서히 걷히고 있으며 그에 따른 새로운 힘의 균형과 질서가 동북아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어떤 비전과 공약을 들고나올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올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하나하나가 이 중차대한 시기 바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것이기 때문에 과학자인 나의 위치에서 올바른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만한 보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전문분야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의 기초과학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잠시 큰 틀에서 이야기를 하게 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렇듯 큰 틀에서의 '전략적인 관점'이 없는 후보가 기초과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도 '정치적 바람'이 있다
전략적인 관점은 통합적인 사고와 분석, 그리고 전 지구적인 시야를 요구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우리는 편의상 정치, 군사, 경제, 외교, 문화 등등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수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의 총체이다. 지금 막바지에 이른 한미FTA가 아주 좋은 예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미FTA를 경제문제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한미FTA의 본질은 시장통합이 아니라 '무역동맹'이다. 한국정부가 무리를 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한미FTA에 집착할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 한 가지는 더 이상 미국이 '목숨을 바쳐' 남한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철저히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여 왔다. 냉전시기에는 체제경쟁을 위해 남한을 북한보다 훨씬 더 잘 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쇼윈도' 정책의 일환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미 그 체제경쟁은 끝난 지 오래다. 휴전선 부근 미 2사단이 목숨 걸고 '한강문명'을 지킬 목적을 이미 충분히 달성했고 이제는 더 이상 그 존재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주한미군이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되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이해, 그들의 변화하는 한반도 전략과 맥락을 같이한다.
물론 남한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고 수많은 외국자본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맘 편하게 미국이 불장난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미국의 최후의 보루는 남한이 아니라 일본이다. 이 점은 최근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장관의 이른바 '2차 아미티지 보고서'에도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무엇보다 중국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군사전략상으로 매우 중대한 요소다. 미 1군단 사령부를 일본에 배치하며 미일군사일체화를 꾀하는 것은 사실 2차 대전이 끝날 때부터 양국이 추구해 온 '대륙 동반경영'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말 그대로 하나의 '발판' 이상의 의미가 없다. 여차하면 250만 중국인민군이 밀려들지도 모를 땅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잿더미가 되어도 상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변화하는 미국의 한반도 전략의 요체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란 불리할 땐 언제든지 발을 뺄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론, 미국은 한반도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한강문명'을 지키기 위해 예전처럼 자기들 목숨까지 걸지는 않을 것이다. 한반도는 그들의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항상 무역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가 사력을 다해 한미FTA를 추진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에는 이렇듯 변화하는 동북아 상황에서의 '필사적인 생존전략'이 숨어 있다. 시장을 통합해서 좀 불리한 장사를 하더라도, 이렇게 되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마음놓고 불장난을 할 가능성은 현격하게 줄어든다.
노무현 입장에서는 전쟁만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여겼을 법도 하다. 예전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미국이 입증하기 위해 남한을 목숨 걸고 지키면서 경제기적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면, 노무현 정부는 시장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미국이 남한에 '목숨을 걸어야 할' 새로운 이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계철선의 역할을 담당했던 미2사단이 이제는 통합된 시장, 즉 FTA로 대체되는 셈이다.
대선 예비주자들은 '큰 틀'에서 고민해야
무역동맹에 의한 한미동맹의 업그레이드와 동북아 다자간 안보틀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중차대한 고민들이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심도 있고 폭넓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에는 이런 수준의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싱크탱크가 거의 없다.
대선 예비주자들도 분당·탈당이나 경선방식에만 관심이 많지 이런 전략적인 관점에서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누가 여당의 치어리더가 될 것인지, 경부운하를 팔지 말지, 그런 한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최상단위에서의 전략적 관점의 부재는 그 하위단계로 계속 이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군사, 외교, 조세, 인재.
이 넷은 말하자면 뼈대에 해당한다. 다른 요소들, 예컨대 경제 등은 여기에 붙는 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이 한 단계 높은 추상수준에서 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한 국가의 전략 혹은 비전이며, 이를 현실화시킬 물적 기초가 인프라이다.
그 중 특히 군사문제는 국가안보에 직결된다. 대통령은 무엇보다 국군통수권자로서 국민의 생명과 영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 그런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군사에 대한 자신의 전략적 비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지 않는 현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노동집약적인 경제구조로는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대한 육군 중심의 냉전적 군대로는 앞으로 우리의 생명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 외적인 상황 또한 전면적인 군사개혁을 강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첫째, 아무리 협상용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현재 우리 군의 방어개념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둘째, 6자회담이 타결의 실마리를 보이며 북미 사이에는 평화협정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이 현실일정에 오르게 되면 예컨대 휴전선에 대치중인 200만에 가까운 남북한 병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것이다. 냉전체제를 대체하는, 보다 전략적인 관점에서의 방위개념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셋째, 이와 함께, 조만간 전시작통권이 환수된다. 우리 군이 직접 우리 입장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쟁을 기획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군 대신의 '총알받이'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구조(비대한 육군과 왜소한 해·공군이 대표적인 예다)가 대대적으로 바뀔 것이 자명하다.
넷째, 무엇보다 동북아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가까운 미래 불특정 요인에 의한 안보위협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위개념(북한=주적을 뛰어넘는)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 군은 지난 반세기동안 전략적인 군사행동에 대한 개념자체를 가질 수 없었다. 이는 1천㎞ 이상의 작전거리를 가지는 신형무기(F15K나 현무III 같은)만 가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전략적 모색'이다
과학자이기에 앞서 한 명의 유권자로서 나는 이런 논의들이 우리 사회에서 생산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더 나아가 이런 고민이 없는 대선후보에게 기초학문의 전략적 가치와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현실을 호소해 봐야 '공약(空約)'만 남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지난 2006년 <신동아> 6월호에 '한국-몽골 국가연합'이라는 흥미 있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아직 아이디어 수준이긴 하지만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오랫동안 위협을 받아 온 두 나라 사이에 서로의 필요성이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유력 대선주자들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이에 대해 "그럴 필요성이 있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논평했고 박근혜 측의 한러문제연구소에서도 "사막녹화를 통한 한-몽 공동체 구축"이라는 견해를 냈다고 한다.
여론조사 1, 2위 후보들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면 조만간 세간에 엄청난 화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필부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겠지만, 혹여 이와 관련된 공약이 나온다 하더라도 한때의 표심을 혹하기 위함이 아닌,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는 '전략적 모색'의 산물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몽골에만 머물지 않는, 그 너머 중앙아시아와 중동과 아프리카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글로벌한 성찰의 결과로서 말이다.
그런 후보라면 장차 이 이름 없는 물리학자의 읍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