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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사람들은 기초과학연구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은 로봇을 연구하는 한 연구실의 모습.(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 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인재양성이다. 군사든 외교든 혹은 어떤 제도와 정책이든 그것을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자원도 빈약하고 영토도 좁고 인구도 적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라면 사람의 중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믿을 것은 고급인력밖에 없지 않은가.

인재양성에도 여러 수준과 대상과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기초학문에 종사하는 인재들의 양성에 국가가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내가 물리학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내 생각들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물리와 수학과 지질과 역사와 언어와 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대선에 나선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기본을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현업 과학자의 이 '편견'도 한번쯤 들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나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기초학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편견들을 먼저 바로잡고자 한다.

[편견 ①] 선진국에서나 하는 일? '선택' 아닌 '필수'

첫째, 기초학문은 국가 생존을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초학문은 배부른 선진국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초학문을 육성하기보다 투자대비효과가 훨씬 더 큰 기술개발에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이라는 그럴 듯한 경제논리도 항상 등장한다.

그러나 한 나라가 기초학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바로 우리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득만 따지자면, 예컨대 기상 사진을 일본에서 사 오는 것이 자체 위성을 쏘아 올리거나 혹은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힐 것이다. 이는 그리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의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기상청은 이 값비싼 기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활용할 전문 인력이 없어 예전보다 못한 기상오보에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해마다 집중호우와 기상이변으로 큰 인명·재산피해를 되풀이하면서도 근본적인 대책은 여전히 요원하다.

기상문제뿐만이 아니다. 식량·영토·자원·역사 등등은 지금도 직접적이으로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 분야에서의 전문가들은 사실 총없는 전쟁을 치르는 병사와도 같다.

분단체제에 살고있는 우리는 대체로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휴전선 지키는 장병들을 무척이나 각별하게 대한다. 그러나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문제만큼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을 먹이고 재우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편견②] 역량이 부족하다면, 더 전략적으로 인재 키워라

▲ 서울의 한 병원 의·과학연구소(기사 내용과 특정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전수영
둘째, 우리 국가 역량으로는 기초과학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도 팽배하다.

만약 한 나라 기초과학의 성공을 아인슈타인급 과학자를 몇 명 배출했는가, 노벨상 수상자를 몇 명 확보하고 있는가로만 판단한다면, 당분간 한국이 '성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일차적인 성공을 자생력의 확보라고 생각한다. 기초학문은 말 그대로 '지식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의 대기,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캐낼 수 있다면 적어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불행히도 아직 많은 분야에서 우리는 이 자생력이 없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처지에 그렇게 많은 국가역량을 기초학문에 투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은 정확히 100℃가 되어야 끓는다. 80℃나 99℃는 수증기를 만드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 국가와 비교해서 인구비례가 어떠니 GDP 대비가 어떠니 하는 말들은 기초학문의 자생력에 대한 이 임계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데도 아직 수준 이하라면, 오히려 훨씬 더 비대칭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를 해야 남들을 따라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삼성의 수원연구소는 단일 연구소로는 동양 최대이며 박사급 인력만 2000여명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삼성 경쟁력의 원천임은 자명하다.

또한, 한국 경제의 큰 버팀목인 조선산업도 중복투자가 우려될만큼 압도적인 물량으로 세계 1~7위 업체를 독식하고 있다. 그 경쟁력의 핵심은 막대한 설계인력이다. 일본은 전체를 통틀어 2000여 명의 설계인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조선업체들은 회사마다 1300여명의 전문설계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들 핵심연구 인력을 국가역량에 맞게, 혹은 일본과 인구나 국력을 비교해서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초학문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력에 비례하는 숫자대로 대책없이 인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해당분야에 대한 전략적인 가치판단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비대칭적 집중이 우리의 생존전략이어야 한다.

한류가 중요하고 고구려가 중요하고 독도가 중요하고 인공위성과 우주개발과 자원 확보가 중요하다면, 그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게감만큼이나 전문인력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만주를 되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의 사회과학원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연구소부터 지어라.

[편견③] 비용? 국방개혁의 40조원과 BK21의 3000억원

셋째, 문제는 돈이 아니라 마인드이다.

이쯤해서 경제도 어렵고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돈으로 기초학문에 돈을 쏟아 붓느냐는 반론이 나올 법 하다. "경제도 어려운데…" 이 레토릭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숱하게 들어왔다. 경제가 어려우면 어렵다는 이유로 민주화나 개혁적인 요구들을 외면해 왔고 경기가 좀 좋아지면 "이제 막 경제가 좋아지려는데…"라는 말로 입을 막아 온 것이 지난 30여 년 아니었던가.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한해 예산이 200조원이 넘고 국방비로만 약 20조원 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물리학 분야 최대 프로젝트는 겨우 100억 원 규모다. 2차 두뇌한국21사업(BK21)은 한해 3000억원씩 7년간 총 2조1000억원 밖에 안 된다.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국방개혁 2020에 의하면 2020년까지 무려 621조원이 투여된다. 연간 40조원이 넘는 돈이다.

만약 북미수교협상이 무사히 진행되고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정전협정을 대체하게 되면, 말 그대로 '휴전선'은 없어진다. 즉, DMZ를 놓고 대치 중인 남북한 200만 병력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사실 대선후보님들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를 심도있고 진지하게 성찰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방안들로 지금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 나는 무척 의아하다. 이런 통합된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면 앞으로 국방비를 대폭 줄일 수 있고 그 돈으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기획할 수 있다.

연간 40조원(국방개혁)과 3000억원(BK21)의 이 천양지차를 줄이는 것은 그래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의 '마인드' 문제이다.

▲ 연간 40조원(국방개혁)을 선택할지 3000억원(BK21)을 선택할지, 이는 결국 지도자의 '마인드' 문제이다. 사진은 지난 2005년 9월 국방부의 '국방개혁안' 기자회견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초학문 특별법 제정'을 제안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차기 정부가 기초학문을 나라의 '국책사업'으로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잘 나가는 몇몇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는 땜빵식 사업으로는 (생색내기야 좋겠지만) 미래에 우리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기초학문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기초학문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을 말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기업이 쓰기에 좋은 중저급 인력들만 넘쳐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이공계 위기의 본질에 다름 아니다.) 값비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을 직접 캐낼 수 있는 '핵심연구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야별로 적어도 대략 지금의 2~3배의 고급인력이 확보되어야 자생력을 가질 수 있다.

물리학을 예로 들자면, 가장 큰 연구단위라 할 수 있는 서울대 물리학과의 경우 교수진이 50명이 채 안 된다. 기초과학 제대로 하려면 미국이나 일본처럼 교수진이 100명 넘는 대학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초과학과 기초인문학을 아우르는, '기초학문 특별법'이라도 제정해서 국가가 앞장서서 핵심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고속철 사업 하나 더 한다는 심정으로 정부가 달려든다면 선진한국의 미래는 그만큼 더 확실할 것이다.

기초과학으로 돈벌라는 것은 '쓰레기' 논리

얼마 전 포스텍을 수석 졸업한 한 학생이 의대로 편입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선배 과학자로서도 매우 안타까웠던 그 소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그러나 실망스러웠다. <조선일보>는 2월 27일자 사설에서 빌 게이츠 등을 언급하며 "장차 몇천, 몇만 명에게 새 일자리를 마련해 줄지도 모를 과학 인재를 또 한 명 잃었다"고 한탄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과학자를 어떻게든 기술개발해서 돈 버는 원천기술을 만드는 사람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아는 과학자들 열에 아홉은 돈 버는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 나 또한 입자물리학자로서 장차 몇천은 고사하고 몇명의 일자리도 만들 자신이 없다.

입자물리는 그런 일을 하는 분야가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저 자신의 연구를 위해 애쓸 뿐이다. 기초학문을 이런 식으로 경제논리의 하위에 두는 고정관념이야말로 과학 인재를 죽이는, 참으로 '쓰레기'같은 생각이다.

얼마 전 <동아일보>의 어느 칼럼에 소개된, 미 하버드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안을 주도한 그 대학 문리대 학장의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이번 개편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인 인문·사회·과학교육(liberal education)이 우리의 원칙임을 다시금 천명합니다. 우리는 기능(Ubung)이 아닌 교양(Bildung)을 강조하고, 불편부당한 진리 추구가 그 자체로서 목표임을 재확인하며, 철이른 전문화와 기능교육에 대한 모든 압력을 거부합니다."

대통령이 되시려는 분들은 꼭 한번 새겨듣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 또한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돈벌이 기계가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태그:#기초학문, #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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