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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레이펑은 없고 구호와 선전만이 요란한 박제된 레이펑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살아있는 레이펑은 없고 구호와 선전만이 요란한 박제된 레이펑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 레이펑기념관
레이펑의 삶과 죽음은 그를 완벽한 인민영웅으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레이펑은 1940년 12월 후난(湖南)성 왕청(望城)현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지주의 압박에, 아버지는 국민당의 탄압에 죽고, 어머니는 지주에게 능욕을 당해 자살하며, 형은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죽는다.

일곱 살에 고아가 된 레이펑은 정부의 지원으로 힘겹게 소학교를 졸업하고 통신공무원으로, 트랙터 기사로 일을 하는데 이때 홍수에 떠내려갈 시멘트를 동료들과 함께 온몸으로 지켜낸 일로 이름이 알려지고 표창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스무 살에 공산당에 입당하고 군인이 되어 수송부대에서 일하다가 1962년 8월 15일,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동료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비록 레이펑의 삶은 짧지만 그가 남긴 영웅적인 일화들은 이상하리만치 많고 또 한결같이 감동적이다. 물로 배를 채우며 모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첫 월급을 전액 농기구 구입자금으로 기부하는가 하면, 군인시절 받은 월병은 병원부상자들과 나눠먹고,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에 공사장의 일손이 부족한 것을 알고 함께 벽돌을 날랐다는 얘기까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다.

또한 레이펑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의 일기에는 그가 매일 마오쩌둥의 어록을 공부하고 '딩즈(釘子, 못) 정신(어려움을 뚫고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희생정신)'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웨이런민푸우(爲人民服務)'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웨이런민푸우'는 중국의 대다수 관공소에 걸린 마오쩌둥의 친필 문구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초중고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운동장에서 과거 우리나라의 애국조회와 비슷한 행사를 갖는데, 줄을 맞추거나 행진을 하다가 멈출 때의 구호가 바로 "웨이런민푸우!"이다. 우리가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제자리에 서듯이 중국학생들은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다짐을 하면서 제자리에 서는 것이다.

돈을 더 밝히는 중국인들에게 '레이펑'은?

그러나 자본주의보다 더 돈을 밝히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봉사와 희생의 미담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레이펑 추모의 물결이 3월 내내 중국전역을 요란스럽게 휘몰아쳐도 이제 더 이상 중국인들은 레이펑에 감동하지 않는 것만 같다. 여전히 자신의 일이 아니면 결코 다가서지 않으며 다만 몰려들어 구경만 하는 웨이칸런(圍看人, 빙 둘러서서 제3자로서 구경만 하는 사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몇 해 전 베이징마라톤대회에서 한 선수가 쓰러졌는데 많은 중국인들이 주위에 몰려들긴 했지만 쓰러진 선수를 업고 구급차로 뛰어간 것은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중국에 레이펑은 모두 죽었는가' 라는 자조 섞인 기사가 나오기도 했었다.

최근 인터넷에는 레이펑이 다양하게 패러디되어 회화되고 있다. 레이펑의 유명한 일화들 또한 어처구니없는 우스갯소리로 변모되어 인민영웅의 엄숙함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중국인들도 조금씩은 느끼는 것처럼 레이펑의 영웅적 이미지가 다소 조작되고 과장된 측면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철저하게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날의 중국은 오히려 살아있는 레이펑 정신이 더 필요해졌는지도 모른다. 레이펑의 동상 아래로 '웨이런민푸우'의 요란한 구호와 선전만이 난무하고 박제된 레이펑 정신은 덩그러니 지난 시대의 퇴물로 자리만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정브리핑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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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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