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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겨 속지를 들여다보면 작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밑으로 이런 말이 있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은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다.'

고3 수험생 시절에 나는 통학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노래가 따로 정해진 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켰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래 대부분이 하루 종일 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듣고 웃을까봐 수줍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시험을 기다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다 그렇다. 노래는 그 자체로 시간을 견디는 큰 힘이 된다. 소설가 한강이 새로 펴낸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는 그렇게 주춧돌이 되어온 노래에 대한 추억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것은 쓸쓸한 풍경의 옷을 입기도, 또는 향기 가득한 웃음의 옷을 입기도 한 채 독자들을 맞이한다.

하나하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읽는 이 자신의 숱한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단연코 이 산문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피아노가 없어 건반이 그려진 종이위에다 연습을 했다는 그녀처럼, 남몰래 좋아했던 키 작은 아이에 대한 추억처럼. 아, 맞아. 나도 저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래, 내게도 그런 소녀가 있었어. 읽을 때마다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작가와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비채
1부가 단순한 일화라면 2부는 특정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는 '쑥대머리',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가사에 매료됐다는 들국화의 '행진' 그리고 고인이 된 김현식과 김광석의 노래까지.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와 국적의 노래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다. 잘 알지 못하는 노래가 소개되더라도 책장이 허투루 넘어갈 일은 없다. 공감할 만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들이 노래와 어우러져 읽는 이의 눈을 한 곳으로 붙잡아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의 진짜 백미는 책 뒤에 첨부된 노래CD에 있다. 책의 3부는 바로 그 노래들을 만들게 된 동기와 가사를 담은 지면에 할애됐다. 이 챕터를 가장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노래CD를 틀어 놓고 읽는 것이다.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게(12월 이야기 中), 안아주기에도/우리 삶은 너무 짧잖아요(내 눈을 봐요), 나의 꿈은 단순하지/너와 함께 햇빛을 받으며/걷는 거지 이 거리를(햇빛이면 돼), 해는 뜨고 또 밤은 찾아오고/가슴 깊이 묻어놓은 노래/가만가만 입속으로 부르네(가만가만, 노래)'

작가는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왔다는 밤의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기 시작했고, 곡에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그 노래들을 편곡하며 총 음반 작업을 지휘한 것은 작곡가 한정림의 솜씨다. 그녀에게 수줍게 테이프를 건넨 뒤 작가는 숙련되지 않은 목소리를 음반으로 내도되는지 걱정했다고 한다. 그 때 작곡가 한정림은 이렇게 말했단다. 마음만 소박하게 담아놓자고.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또는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훌륭한 음악인들을 만난다. 엄청난 기교와 탁월한 무대 매너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다. 반면 한강의 목소리는 그런 전문적인 음악인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녀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채 자신이 만든 곡을 진실 되게 소화한다.

작가 한강의 말마따나 정말 가만가만 부른다. 곡을 만든 이야기들과 가사를 보며 나지막한 그녀의 음성에 귀기울이다보면 우리는 소박한 마음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조우 속에서 퍼지는 깊은 울림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버리고 싶은 것은 한숨 쉬는 습관, 얻고 싶은 것은 단순함과 지혜'

작가의 약력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 이 말이 어쩌면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를 설명해주는 가장 명료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어두운 내용의 가사들이 담긴 노래는 모두 뺐다고 고백한다. 그리곤 잘한 것 같다고, 글과 마음으로 많이 덜어내며 썼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글과 노래들, 정말 오랜만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되어 가는 대중가요의 홍수 속에서 때 묻지 않은 마음은 우리 모두를 미소 짓게 한다. 작가 말마따나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햇빛 쏟아지는 소리, 한강의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 어울리는 말이다. 짙은 구름을 걷고 '웃자, 웃어보자, 우리 함께'라고 말한다. 당신이 만약 한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다정스럽게 건네는 그녀의 손을 놓치지 말라. 두근두근 뛰는 심장에 물큰물큰, 추억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한강 지음, 비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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