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불륜 드라마들은 현실을 반영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극적인 내용을 위해서 불륜을 채택했다는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리고 몇 가지 방식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어, 시청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그 방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을 낳는 불륜의 방식은 MBC <있을 때 잘해>와 KBS <행복한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자의 불륜은 여자 때문?
@BRI@KBS 주말연속극 <행복한 여자>(연출 김종창, 극본 박정란)의 주인공 이지연(윤정희)은 한때 그야말로 '행복한 여자'였다. 비록 시어머니와 원만한 관계는 아니지만, 능력 있는 남편과 너그러운 시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친구들과의 모임으로 스키장에 가게 되고, 지연에게 거듭 함께 가기를 제안한다. 생활에 바쁜 지연은 남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런데 이 스키장에서 남편은 옛 친구 조하영(장미인애)을 만나서 불륜에 빠진다.
MBC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연출 장근수, 극본 서영명)의 오순애(하희라)는 전형적인 주부였다. 집과 남편 그리고 아이밖에 모르고 음식 잘하는 것이 최고의 장점인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과는 달리 주변에서는 평소에 여성스럽지 못했던 그녀의 잘못도 크다는 책망을 듣는다.
<행복한 여자>와 <있을 때 잘해>의 가정파탄의 원인 제공자는 겉으로 보기에 남자인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피해자인 여자에게 잘못이 있는 듯하다. 남편과의 관계보다 돈과 집, 또는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무신경한 유부녀들 때문에 외롭고 길 잃은 남편들이 새로운 관계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에는 주부가 여자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가정도 잃게 될 것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이 담겨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논리인가? 불륜으로 인한 가정 파괴의 원인은 당연히 불륜 당사자에게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깊이 박혀있는 남자중심 문화는 21세기 드라마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바람을 피운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기보다는 자신의 어떤 잘못 때문에 배우자가 떠났는지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혹시 아직도 남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이 있을 때를 대비하려는지, 한 번 더 여자에게 불륜의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즉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 상대 여자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시킨다.
<행복한 여자>의 지연의 남편은 저돌적인 조하영에게 꼼짝 못한다. 이를 모두 증명하듯, 불륜사실을 알고 나면 친구도, 지연도, 시어머니도 모두 조하영에게만 찾아간다. <있을 때 잘해>의 배영조(지수원)는 더 심하다. 뻔뻔하기까지 한 이 여자는 뭔가 미심쩍기까지 하다. 그런 탓에 남편은 이 여자의 검은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남자의 불륜 상대자들은 세련미를 앞세워 그들을 유혹한다. 그 유혹이 치명적이라 어느 남자라도 쉽게 빠질 것 같다. 이처럼 드라마들은 상대 여자의 캐릭터에 악의적인 면을 심어 넣어, 남편들의 변명거리를 만들어 준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불륜이 어찌 한 사람의 나쁜 의도로 이뤄지겠는가? 당연히 남편들과 상대 여자의 잘못된 의도가 맞아서 소리가 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마치 여자의 잘못이 큰 듯 묘사해서, 암묵적으로 남편의 잘못보다 여자의 잘못이 더 크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불륜의 잘못은 여자만의 것이 아니다. 남자와 상대 여자의 공동의 잘못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
드라마에서 인자함의 대표캐릭터 어머니, 그러나 거기에 '시'자가 하나 붙으면 악행의 대표 캐릭터가 된다. 자상하고 너그러운 시아버지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항상 불만이 가득하다.
<행복한 여자>의 정희도 시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미운 오리 취급을 당한다. 그리고 불륜사실을 알고도 시어머니는 아들의 밥을 차려주지 않는 며느리를 욕한다. <있을 때 잘해>의 시어머니는 대놓고 아들 편을 든다. 그리고 아들의 재혼을 서두르는 뜨거운 모정(?)까지 보여준다.
왜 시부모님 중에서도 시어머니에게만 악한 행동을 맡기는 걸까? 이렇게 드라마에서 아들의 불륜에 대한 시어머니들의 상식 이하의 행동이 등장할수록, 마치 모든 시어머니들이 그렇게 행동할 것만 같아 보인다. 이처럼 많은 불륜드라마에서 여자의 적은 시어머니, 즉 여자이다. 하지만 불륜에서 여자의 적은 시어머니가 아니다. 잘못된 인식이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심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드라마의 단골 메뉴인 사랑이야기. 그러나 불륜에서만큼은 그 사랑이야기가 위험한 점을 내포한다. <있을 때 잘해>의 오순애가 한 인생 최고의 선택은 그녀의 딸을 강진우(변우민)의 정신병원에 데려간 일이다. 그녀는 멋있고, 능력 있고, 매너까지 갖춘 강진우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고, 불륜과 이혼의 아픔을 모두 날릴 수 있었다.
<행복한 여자>의 이지연(윤정희)는 잠시 남편의 불륜 때문에 불행한 여자가 됐지만, 그녀에게 곧 새로운 사랑(김석훈)이 다가올 것이다. 그녀는 그를 통해 다시 '행복한 여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에서는 불륜으로 이혼한 여자들에게 더 잘난 남자를 선사한다. 만약 이혼 후 새로운 남자가 주변에 없다면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사업에서나 일터에서 성공하더라도 그 인생은 실패로 간주된다.
하지만 여자의 행복은 자기완성에서 찾아야 한다. 남자에 의지해 얻게 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는 이 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새로운 남자와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야말로 퇴보된 여성상을 보여준다. 이제는 드라마에서도 21세기의 여자를 보고 싶다.
이처럼 드라마가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불륜의 방식 때문에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 사람도 생겼을 것이다. 즉 그동안 불륜의 원인 제공자도 여자이고, 그 여자를 괴롭히는 주체도 여자지만, 이 여자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존재는 남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드라마가 제공해왔다.
지금부터라도 올바르고 평등한 남녀관계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그래서 많은 남편들이 부인에게 '있을 때 잘해'서, 그만큼 '행복한 여자'가 늘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