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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19일 개막한 제6차 6자회담 첫날 회의를 마친 뒤 숙소인 베이징 세인트레지스 호텔로 들어서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정훈

"BDA에 동결된 북한 자금을 다 합쳐봐야 보스턴 레드삭스가 마쓰자카 선수 하나를 데려오는 데 쓴 계약금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가 올해 2월 5일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점심식사 자리에서 들려줬던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베이징에서 김계관 북한외무성 부상, 우다웨이(武大偉)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3자가 만나 6자회담 재개를 놓고 협상을 벌이던 도중 나눴던 여담이라고 했다.

마침 일본의 '괴물 투수'로 한국 야구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학창시절 야구선수가 되려고 했을 정도로 야구를 좋아하며, 고향팀 레드삭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힐 차관보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가는 뉴스였을 것이다.

레드삭스가 마쓰자카 선수에 대한 독점 교섭권을 얻기 위해 지불한 돈은 계약금만 무려 5000만 달러(약 470억원).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된 북한자금의 꼭 2배가 되는 액수다.

힐 차관보의 조크에는 "명색이 한 국가를 경영하면서 야구선수 한 명 몸값의 절반도 안 되는 돈에 그렇게 집착하느냐"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북한이 지금의 고립된 체제를 벗어나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면 '돈 단위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불법행위 했다고 하면서 결과는 '전면해제'

지난 1년 반 동안 북핵 협상의 발목을 잡았던 'BDA 문제'가 19일 베이징에서 미국 측의 '전면 해제' 방침 공식발표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동결자금 2500만 달러의 실제 반환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더 이상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미국의 이날 발표는 철저히 '정치논리'에 입각해 있다. 사실 지난 14일 미 재무부의 조사결과 발표까지만 봐도 동결 북한자금의 전면해제 조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 재무부는 BDA의 많은 북한계좌 예금주들이 돈세탁과 달러화 위조, 마약 거래 등에 연루된 기업들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BDA는 비정상적인 계좌의 출처를 입증하는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미 금융기관들의 BDA 계좌 유지와 BDA의 미 금융시스템 접근 금지라는 강력 제재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힐 차관보과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부차관보가 함께 발표한 19일 성명은 "북한은 BDA에 동결된 약 2500만 달러의 자금을 베이징의 중국은행 내 조선무역은행 계좌로 보내줄 것을 제안했다"며 "우리는 이것이 북한 관련 동결자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돼있다.

불법행위 확인과 BDA에 대한 그렇게 강력한 제재가 어떻게 '동결자금 전면해제'로 귀결될 수 있는지, 그 인과관계에 대해 어떤 설명도 없는 것이다. "북한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이 자금을 인도적·교육적 목적을 포함, 북한 인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만 쓰기로 했다"는 문구를 집어넣는 것으로 미국은 그나마 최소한의 체면을 건졌다.

당초 불법행위를 단속하기 위한 '법 집행'이라며 협상 대상도 아니라고 했던 미국의 입장에 비춰보면 참으로 '허무한' 결과다.

'9·19공동성명' 사흘 전에 불거진 의혹

▲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쓰자카 선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가 올해 2월 5일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점심식사 자리에서 마쓰자카의 계약금을 언급하며 북한의 BDA 계좌 총액과 비교한 바 있다.
ⓒ MLB.COM
이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2005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 3일 전. 미 재무부는 돌연 BDA를 북한의 달러화 위조와 마약거래에 관련된 ‘돈세탁 우려대상’ 기관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빚어지자 마카오 당국은 서둘러 BDA의 북한계좌 2500만 달러에 대한 동결조치를 취했다.

그 해 11월 열린 5차 6자회담에서 북한이 이를 강하게 문제 삼으면서 한반도의 극한적 위기상황까지 부르게 된 공방이 시작됐다. 북한은 미국이 '9·19 공동성명' 발표와 거의 동시에 자신들의 돈줄을 죄고 들어온 것은 합의 이행에는 관심이 없고, 결국 북한을 압살하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6자회담 참석을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상대조차 해주지 않자 지난해 7월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으로 맞서왔다. 가까스로 재개됐던 지난해 12월 6자회담에서도 북한은 BDA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논의에 들어갈 수 없다고 버텼다.

이렇게 되자 비로소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월 베를린 접촉에서 미국이 일단 이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그 후 상황은 봄 눈 녹듯 풀려왔다.

"액수 문제가 아니라 대외거래 정상화가 목적"

미국이 당초 어떤 의도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조짐을 보이자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을 보면 다시 흐름을 틀기 위한 네오콘 세력의 '기획'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짙게 간다.

이 문제의 본질은 힐 차관보가 비유한 것처럼 꼭 메이저리거 한 명의 몸값도 안 되는 액수 때문에 벌어진 공방만은 아니었다. 힐 차관보도 김계관 부상에게 그렇게 말할 때쯤에는 이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 재무부가 BDA를 북한과의 불법거래 은행으로 잠정 지정하자 전 세계 은행들이 북한과의 거래를 끊었다. 미국의 제재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의 모든 대외거래가 사실상 중단됐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런 파급효과를 계산에 넣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북한이 그토록 끈질기기 'BDA 문제' 해결에 매달렸던 것은 단지 2500만 달러를 돌려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외거래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끝까지 '전면해제'를 고집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북-미 양측이 얻은 교훈

결국 'BDA 문제'는 미국이 그토록 주장해왔던 '법 논리'를 떠나 '정치 논리'로 풀렸다. 미국은 상당히 체면을 구겼다. 역사에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미국이 진작 이런 자세로 나왔다면 북한이 과연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까지 했겠는가 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BDA 해결 과정을 통해 양측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미국은 북한이 웬만한 압박으로는 무너지지 않는 체제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런 인식은 결국 협상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북한으로서도 미국의 압박이, 국제적 고립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됐을 것이다.

양측 모두 이런 교훈을 살려나간다면 앞으로의 협상은 보다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언제, 어디서 'BDA 문제'와 같은 돌발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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