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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과 <주몽>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주몽>은 시청률 40%대의 장기집권으로 <하얀거탑>은 열렬 시청층의 쇄도하는 찬사로, 그렇게 두 드라마는 한동안 TV와 인터넷을 잇는 방송네트워크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잦아들 줄을 모른다. 이들 드라마에 대한 과잉 열기는 드라마 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몇 가지 징후들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존 멜로드라마의 쇠락에 대한 결정적 반증이다. 정통멜로건 트렌디건 할 거 없이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취향의 멜로물들이 눈에 띄게 침체기에 접어든 것이다. 봉달희의 의지도 달자의 안간힘도 대세를 뒤집기엔 한참 힘이 딸리는 듯하다. 달콤하고 안락한 로맨스의 세계는 이제 피비린내 나는 침략과 살육의 세계나 잔인하고 비정한 직업세계 뒤로 물러났다.

남성드라마들의 비약적인 선전과 약진

두 드라마의 이러한 성공은 확실히 남성드라마들의 비약적인 선전과 약진을 말해준다. 드라마 보는 남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이들 남성드라마들의 성공이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인 현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주몽>의 놀라운 성과는 <태왕사신기>, <대왕 세종>, <단군> 등으로 이어져 한창 불어 닥친 남성영웅 중심의 사극붐을 더욱 부추길 것이며, <개와 늑대의 시간>, <에어시티>, <식객> 등 선 굵은 남성 드라마들이 <하얀거탑>의 뒤를 이을 태세다.

▲ <하얀거탑>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전문직드라마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해준다.
ⓒ MBC
특히 제목부터 낯설었던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우리 드라마에서 항상 불모지로 남아있던 '전문직' 드라마의 개발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해준다. 공교롭게도 몇 개의 의학드라마들이 동시에 기획되고 방영되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전문직드라마들에 대한 관심과 욕구는 더욱 거세질 듯하다. 아직 의학이나 법정, 형사물 등 한정된 분야로 쏠림 현상이 심하고, 직업세계가 캐릭터를 위한 단순 배경에 머무는 한계를 벗어나야 할 힘겨운 과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직드라마의 실험은 우리 드라마의 세대분화와 장르분화를 촉진시킬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문직드라마 속 직업세계는 그 자신만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운영체계와 조직생리를 갖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 세계 바깥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조직 질서를 드러내줄 때, 그 세계 역시 그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은 논리와 질서로 돌아가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줄 때 비로소 이해와 공감이 가능해진다. <하얀거탑>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치열한 생존과 경쟁이라는 거대한 사회 논리가 한 대학병원 안에 응축되어 집약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주몽>이 거꾸로 뒤집힌 세계가 <하얀거탑>

그런데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다시 한 번 주몽과 장준혁(김명민)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조건 없는 선과 악, 절대선과 절대악을 체현한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주몽의 절대선이 무조건적인, 절대적인 민족적 주체성을 구현하듯이, 장준혁은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논리를 온전히 구현한다. 주몽이 그러하듯, 장준혁은 선과 악 사이에서,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길로 묵묵히 그리고 단호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리하여 <주몽>이 거꾸로 뒤집힌 세계가 바로 <하얀거탑>이다. 그곳은 선과 악이 뒤집힌 세계이다. 선한 세계 속에 뿌리박힌 악이 아니라, 반대로 어떠한 선도 살아남지 못하는 악의 세계이다. 병원은 타락하고 부패하여 정화되고 바로 잡혀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조직 자체가 완결한 체계적인 거대한 악이다. 그 악이야말로 조직 자체의 본래적 선결 조건이자 구성 원리이다.

우리의 주인공 장준혁은 그러한 근본적인 악을 스스로 체현한다. 최고의 외과의가 되려는 야망으로, 명예와 권력을 위해,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끝을 향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마다 않고 내달린다. 여기서 악은 단순한 타락이나 부패 그 이상이다. 그는 이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지닌 외과의사이고, 자신의 무능을 음모와 협잡 따위로 가리는 얕은 수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는 자가 승자가 되는 거대한 파워게임의 공동의 암묵적 행위양식 같은 것이다. 그의 욕망은 결코 조직의 이해와 모순되지 않는다.

장준혁이라는 인물이 매력적인 진짜 이유는 바로 그가 지닌 열정의 맹목과 무지 때문이다. 뚜렷한 이유도 명확한 목표도 없다. 그에게는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개인사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체로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다. 그의 맹목과 무지는 그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거나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코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재판의 과정은 어떻게 진실이 드러나는가가 아니라, 진실이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가려지고 마침내 사라져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재판과정의 핵심은 조직이 배신자들을 어떻게 가려내고 분리시키는가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오진과 실수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상고이유서'가 말해주듯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 거부의 행위는 그가 지닌 신념과 열정의 압도적 무게를 실감케 한다.

이것은 정확히 근대 이성과 합리성의 내재적이고 구성적인 이면이다. 근대 이성과 합리성이 그 자체 내에 포함하는 필연적 계기라는 것이다. 장준혁의 끝 간 데 없는 자만심과 오만함은 이러한 거대한 이성체계의 뒷배를 배경으로 해서만 감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비루해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는 비정하고 비열할망정 결코 비루해지지는 않는다. 항소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암세포가 온몸을 장악한 이후에도 그는 초라해지거나 비참해지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자신의 신체를 기증하는 것은 도덕적 반전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자긍심이자 자존심이다.

▲ <하얀거탑>에서 최도영은 장준혁의 대립물이 아니라 보충물이었다.
ⓒ MBC
최도영은 장준혁의 대립물이 아니라 보충물

그렇다면 장준혁의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최도영(이선균)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차마 마주치고 싶지 않은 권력의 추악한 이면, 그 외설성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바로 최도영이라는 인물의 역할이다. 최도영이나 염동일 등이 대리하는 선한 세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따라서 최도영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준혁의 대립물이 아니라, 장준혁의 세계를 보완해주는 보충물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 세계도, 장준혁도 스스로를 지탱하기 힘들었을 완충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멜로 없는 이 멜로드라마에서 멜로적 긴장이 형성되는 것은 주인공들과 그 주변의 여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준혁과 도영 사이에서이다. 서로에 대한 선망과 거부, 애증의 이중심리가 서로 다른 한 길을 걷는 두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묶어놓는다. 준혁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가능한 것은 그가 그토록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내부에 있는 타자, 도영을 끌어안고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준혁은 남성들(나아가 우리 모두)의 모든 악행과 죄의식을 대속(代贖)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부정과 불의와 부패 따위의 악행을 모두 장준혁에게 투사하여 그의 죽음과 함께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의도와 달리 권력의 허망함을 드러내주는 대신, 우리의 죄악을 말끔히 씻어주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거룩하고 숭고해지는 이유이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를 꺾지 않는 남성영웅의 판타지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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