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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다녔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직속 상사인 과장이 나를 지하 카페로 몰래 불렀다. 사직서에 적힌 "일신상의 이유" 말고 그만 두는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유학을 간다고 할까, 아니면 큰 병이 발견되었다고 해버릴까, 짱구를 굴리다가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열심히 일을 하면 여자도 부장 정도는 할 수 있다. 격려하기 위해서는 사장까지 하라고 해야겠지만 솔직히 그건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은 못 하겠다"고 했던 분이니,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업부 사상 처음 맞는 대졸 여사원을 어떻게 부려야할지 혹은 대해야 할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그 과장은 두 딸을 둔 아버지이자 촉망 받는 중견 간부였다.

"과장님 말씀대로 제가 열심히 하면 과장도 하고 부장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과장이 될 때까지 계속 다니다가는 성격파탄자가 될 것 같아요."
"허허, 내가 성격파탄자로 보였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그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을까? 십수 년 전, 왜 사회 초년생의 한 여자가 남성중심의 조직 사회에서 자아가 굴절되고 꿈이 변질될 것을 예상하며 두려워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이후 난 여러 매체에서 최초의 여성 이사, 최초의 여성 공장장 등 여성 고위 간부들의 탄생과 활약을, 여성 CEO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아의 긍지 넘치는 스토리를 종종 접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사진은 웃는 얼굴이었고 나는 그 웃음 뒤에 까칠하게 숨을 조이는 기나긴 세월을 보는 듯했다.

내가 달자씨가 아닌 신자씨에 주목한 이유

ⓒ KBS
요즘은 많은 드라마에서 자아의 꿈을 잃지 않으면서 좌충우돌 삶을 꾸려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과 결혼이 자신의 인생에 큰 사건이 될지언정 그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드라마 작가들이 상당수가 여성들이라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텐데, 피상적이거나 동화처럼 그려지지 않고 상당히 현실적이다.

얼마 전 종영한 KBS 드라마 <달자의 봄>에는 사랑보다 일에 비중을 더 실으며 젊은 날을 살았던 30대 중반의 달자(채림)씨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달자씨는 남자와 키스를 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할 정도로 사랑에 서툴다. 대개의 드라마들이 그렇듯 <달자의 봄>도 달자씨에게 산뜻한 남자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행복하게 끝났지만, 달자씨와 태봉(이민기)군의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했다면 드라마의 인기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남성중심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경쟁의 원리에 기반을 둔다. 그 경쟁에서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입지를 가지게 되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들끼리 더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그러나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이제 거짓명제로 취급된다. 달자씨와 선주(이해영)씨가 공유하는 유대감은 겪을 만큼 겪은 여자들이 오아시스처럼 갈망하는 자매애를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달자의 봄>에서 다른 한 여자, 신자(양희경)씨가 자꾸 눈에 밟힌다. 달자씨의 직장 상사로서, 뚱뚱하다,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웃음이 없다, 말투가 고약하다, 조금만 실수해도 심하게 몰아붙여서 달자씨를 기죽게 한다, 무섭다, 그녀가 나타나면 공기가 험악해진다, 한마디로 재수 없고 까칠하고 정 떨어진다.

그런데 만일 신자씨가 결국 주인공인 달자씨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명백한 악역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한 채 드라마가 끝났다면 나는 <달자의 봄>이 싫었을 것이다.

신자씨는 달자씨 세대와 달자씨의 엄마 세대의 중간 세대로서 달자씨에게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이며, 달자씨가 어려울 때 누구보다 먼저 티 내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다. 신자씨는 달자씨보다 사회생활을 2배 정도 더 한 듯하다.

달자씨가 홈쇼핑의 MD가 되는 과정보다 더 혹독하고 매서운 생존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신자씨로 하여금 여성성을 죽이고 남성보다 더 남성처럼 군림하고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다그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길을 미리 닦아주는 고마운 은인

신자씨도 달자씨만한 나이 때는 장밋빛 인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최대한 믿으려 자기 주문을 거는 불면의 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달자씨보다 어린 멋모르던 20대 때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여자로서의 삶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며 당찬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신자씨는 달자씨의 미래이지만 달자씨의 미래가 꼭 신자씨 같지 않을 수 있도록 길을 미리 닦아주는 고마운 은인이다.

신자씨가 달자씨에게 보여주는 억제된 감정은 여성으로서의 유대감이며 따뜻한 자매애(세대가 다른 여성들이 자매애를 만들 수 있냐고? 당연하다. 신자씨는 달자씨에게서 자신을 보고 달자씨는 신자씨에게서 자신을 보는데 왜 불가능하겠나)다.

신자씨는 표정 없는 얼굴로 웃으며 호된 꾸중으로 쓰다듬는다. 아니 무표정은 무표정이고 호된 말은 호된 말이지만, 달자씨가 신자씨의 그 감정을 느끼게 될 때 그것은 웃는 얼굴이며 쓰다듬는 손길로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달자의 봄>은 보다 거칠게 살아 온 앞선 세대의 여성들의 삶을 이해해 가는 달자씨의 성장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어렸을 적에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엄마를 거부하다가도 여성으로서의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될 만큼 마음이 성숙한 후에는 엄마와 친구가 되는 딸처럼 말이다.

가끔 쓸데없는 가정을 해 본다. 내가 그 회사에 계속 남아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어쩌면 신자씨 같은 재수 없는 상사가 되어, 내 소싯적의 꿈처럼 장밋빛 인생을 꿈꾸는 젊은 여성들을 부하직원으로 맞는다면,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드라마가 끝난 지 일주일이 더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주인공도 아니고 주요 인물도 아니고 그저 '그 외 인물'의 하나인 신자씨가 생각난다.

"신자씨도 참 괜찮은 사람이야."

덧붙이는 글 |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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