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특집 단발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가 일요일 오전 고정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KBS2 <미녀들의 수다>에 나오는 미녀들의 공통점은 미혼의 외국 여성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 사람들, 서툴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외국 사람들 또는 능숙하게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외국 사람들을 몹시 반기곤 했다. 그러나 이제껏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런 기쁨을 안겨주던 외국 사람들은 몇 명에 불과했었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 든 외국 여성들이 수십 명이나 나와서 직접 체험한 한국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부를 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며 머물러 살고 있는 외국인의 수가 50만 명이라고 한다. 여기 출연하는 '미녀들'은 그 50만 명 중에서 프로그램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외국인들이다.
<미녀들의 수다>는 매주 외국인 미혼 여성들 1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두어 가지의 앙케트 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패널 중 한 사람으로 외국인을 배치할 경우 그 외국인의 경험담은 이례적인 경우로 취급되지만, 이런 형식에서는 외국인의 시선이 중심에 놓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미녀들의 수다>는 한국 문화에 대해 본격적인 토크를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인다.
앙케트, 문화적 차이 인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아
그런데 왜 앙케트 형식일까? 아주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백인에게 물었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때 앙케트를 벌였던 주제 중에 기억나는 하나가 "세대 차이를 어떨 때 느끼는가?"였다. 1위부터 5위까지 순위의 내용들을 보면서 당시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재밌었다. 이런 앙케트는 조사 대상이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미혼 여성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한국 대 외국'이라는 범주화가 "글로벌 시대에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다"는, 제작진이 밝힌 취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 남성들, 이래서 좋다"는 조사에서 "털이 없어서"라는 대답이 1위를 했다. 뜻밖의 결과였다. 각국의 출연자들은 웅성거렸는데 이 대답은 외국인 미혼 여성들의 일반적인 입장을 대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아시아권의 여성들은 한국 남성들이 털이 없다는 의견에 생경해 하지만, 유럽과 미주에서 온 여성들에게서는 자국의 털투성이 남성들을 생각하면 너무 깔끔하고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외국인 미혼 여성들 내부의 차이 또한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지 조사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외국인 미혼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털이 없어서"라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앙케트 조사는 공통된 것이 많은 집단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형식이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미녀들의 수다>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앙케트 토크라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들의 구도가 외국인 미혼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의 대화라는 것에 있다.
한국 남성들은 외국인 미혼 여성들의 눈에 비친 한국 문화에 대해 마치 대변인처럼 말을 한다. 심지어는 '한국여자 이럴 때 정말 대단하다'는 주제의 앙케트에 대해서도 한국 남성들이 해설을 한다.
지난 1월7일, 이 방송이 나간 직후 해당 프로그램의 공식 인터넷 게시판에는 한국 여성들을 된장녀로 몰아갔다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글이 쏟아졌다. 한국 여성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남성들과 외국인 여성들의 우호적인 만남을 위한 얘깃거리로 전락한 듯하다.
패널들의 어이없는 해설, 없느니만 못하다
기혼 남성이 출연하더라도 웃어른의 입장에서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것(설특집에서 한국인 패널로 나온 탤런트 이영하는 마치 시아버지처럼 세배를 받으며 덕담 문화를 가르쳤다)이거나 적절한 해설로 가이드를 자처하는 입장이다.
간혹 해설로 덧붙이는 얘기는 지나치게 편협하고 조촐하다. 한 아나운서는 한국 남성들이 욕을 많이 한다는 앙케트 조사에 대해 "나쁜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오락프로그램이라지만,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역할을 할 패널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국 남성 패널들도 대부분 "그것은 일부 한국인들만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다 그런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한다. 외국인들이 호의적으로 보는 것은 한국의 좋은 전통이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치부는 일부의 한국인들에만 국한되는 문제로 돌려버리는 식의 해설은 없느니만 못하다.
어쩌면 이 프로그램엔 외국인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의 결혼을 장려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과장된 생각이 든다. 첫 회부터 외국인 미혼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연예인의 순위를 매기는가 하면, 여기 나오는 외국인 여성들 대부분은 한국 남성을 좋아하며 한국인과 결혼해서 계속 한국에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거듭 밝혔다.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그녀들
에바처럼 예쁘고 사오리처럼 귀엽고 "안주발" 같이 토종 한국인들이나 구사할 법한 용어들마저 적절하게 말 할 줄 알고 한국 문화라면 세발낙지도 통째로 먹어볼 용기가 있는 그녀들은 한국 남성으로 대변되는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그 애정에 대한 최대한의 표현은 바로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다. 물론 그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들이 신랑감을 찾게 되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한국 문화의 이해가 아니라 한국 남성의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녀들의 수다>의 10번째 앙케이트는 바로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때"였다. 이 주제로 50분을 이야기한 후 약 10분에 걸쳐 한국 남성이 싫을 때의 순위를 후다닥 보고 끝났다. 시간 분배도 자연스럽지 않지만, 왜 그날따라 외국인 여성들에게 모두 교복 컨셉트의 의상을 입혔는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 이미지는 아직 미성년이지만 여성성을 착취당하기 쉬운 상태를 연상시키곤 한다. 한국말의 발음과 용법이 서툴고 부정확하지만 애교와 재치, 상냥한 미소로 처신하는 그녀들에게 여고생 교복을 입히다니, 제작진이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부적절했고 만일 의도한 것이었다면 더욱 나쁘다. 아무리 미혼 남녀로 대변되는 협소한 이해의 폭이라 하더라도, 그것조차 쌍방 이해가 아니라 한국 남성들의 이해가 우선시되는 것 같아서 그녀들에게 미안해질 정도이다.
농촌에 고립된 이주여성들을 상기하라
만일 나에게 숨기고 싶은 도덕적 약점 혹은 성격적 결함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면으로 그 약점과 결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나의 선하고 밝고 행복한 측면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방법이 하나 있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한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나를 왜곡하는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들 중 많은 수가 농촌에 산다는 것을 이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방송 프로그램이 이주여성들에 대해 다루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 여성에 대해 늘 100분 토론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농촌에 고립된 이주여성을 지운 채, 도시의 유학생이나 전문직 미혼 여성의 눈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삶을 보려는 것은 현실을 이미지로 만들고 현실을 왜곡하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외국인 미혼 여성과 한국 남성의 만남, 그리고 그들의 행복한 결혼을 연상하게 하는 이 프로그램은 이미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의 삶을 지워버리게 하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꿈꾸는 그녀들은 한국에서의 체험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이해가 아니라 환상의 구축에 기여한다. 외국인 여성과 한국 남성들과의 만남에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으며 어떤 이미지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제작진의 자의식이다.
덧붙이는 글 |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