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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항 물량장 작은 주차장에 대여섯 대의 관광버스가 자리를 잡자 주차장이 꽉 찬다. 검정색 등산복을 입은 남자들과 분홍색과 주황색 옷을 입은 여자들이 쏟아져 배에 오른다. 금오도-안도-연도로 가는 배다.

가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오지만, 봄 산행은 남도의 섬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바다 내음 가득한 갯것들이 있으니 봄 여행치고 섬만큼 좋은 것도 없다. 겨울답지 않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까, 심술을 부리던 꽃샘추위도 풀이 죽었다.

어딘 폭설이라고 야단이기는 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섬 여행을 해 볼 만한 곳이 금오열도다. 금오열도는 안도를 비롯해 연도와 소리도, 화태도, 대루라도, 수두라도, 나발도, 대소횡간도, 금오도, 연도 등 32개의 유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안도는 동도와 서도 두 개의 섬이 연결된 섬으로 모습이 기러기 모양이라 안호(雁號)라고 부르다 1910년경 안도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과거에는 이 섬 사이로 폭 200미터의 수로가 있어 바닷물이 흘렀지만 남쪽 끝에는 사주가 발달해 작은 몽돌이 쌓여 두 섬을 연결하였다.

이 수로를 타고 80여 호가 거주하는 안도리 모습이 한반도를 닮았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도에는 안도리 외에 서쪽 곶에 마을이 형성되어 60여 호가 모여 있는 서고지, 동쪽 곶에 있는 동고지, 마을 모습이 까마귀를 닮았다는 오지암 등 15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 한반도 모양을 한 안도리 모습.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안도어업조합 건물이 있으며, 왼쪽 바다 선착장이 지금 여객선이 닿는 포구다.
ⓒ 안도리

▲ 안도의 중심 안도리와 둠벙안 갯벌
ⓒ 김준
일본, 여수바다를 탐내다

1910년에 발행한 <조선산업지>에 따르면 일본은 1900년대 초 안도에 5가구 20명의 일본인 이주어촌을 건설했다. 그 규모는 울산의 방어진(135호)이나 거제 장승포(120호), 동래부 절영도(227호, 지금의 부산 영도, 이상 1910년대 지명) 등 부산과 경남지역의 이주어촌에 비하면 아주 작다. 안도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愛嬡縣 출신이었다. 이주어촌은 일제가 러일전쟁 전후 본국의 어촌과잉인구를 식민지 어업정책의 하나로 한국연안에 이주시킨 일본어민의 취락을 말한다.

작은 섬 안도에도 1919년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소학교가 지어졌으며, 이외에도 서고지에는 어판장이 세워지고, 이보다 앞서 안도에는 어업조합(마을회관 옆 자리)이 결성되었다. 우리 어업사에 '어업조합'의 등장은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어민들에게 어업권을 가지고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산업지는 야마구치가 편찬한 한국에 관한 조사자료다. 이 자료의 2권에 수산업과 관련된 조사자료와 통계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국의 산업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이 자료에는 이주어촌은 39지역에 모두 1146호에 인구는 4820명이다.

지역별로는 경남이 22곳, 전남 5곳, 함북, 강원, 충남, 평북 각각 2곳, 함남, 전북, 경기, 황해, 평남, 평북 각 1곳이었다. 경남 울산, 동래, 창원, 용남, 거제 지역이며, 전라도 지역은 안도 외에 외나로도 죽정포(13호), 거문도(12호), 무안군 목포(17호) 그리고 전북 옥구의 경포와 군산 지역(21호) 등이다.

▲ 고기를 잡고 여수항으로 돌아오는 고기잡이배. 일제강점기 이 바다는 어민의 바다가 아니라 식민의 바다였다.
ⓒ 김준
당시 이주어촌의 근거지 중 가장 중시하는 것이 어장 근처에 적당한 항만시설과 어획물 판매시장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과 가깝고 어족자원이 풍부해 일찍부터 그물어업이 발달한 경남지역에 이주어촌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도의 이야포와 백금포는 멸치, 갈치, 도미 등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여수 바다의 황금어장이었다.

당시 여수와 돌산에서 출어한 어선들이 안도리를 비롯한 금오열도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산까지 가지 않고 안도에 머물러 잡은 고기를 팔면 상고선이 직접 돌산이나 일본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이런 어장을 일제가 가만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돌산군 안도를 이주어촌으로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우리 어업자원을 상세하게 조사했던 일본은 '한국수산업조사보고'를 토대로 경남지역은 물론 돌산 앞 바다 등 서남해의 어업자원을 겨냥한 이주어촌을 안도와 거문도에 세웠던 것이다.

풍성한 경관을 갖춘 아름다운 섬

선실 풍경은 세 가지다. 주민들은 배에 타면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잔다. 섬 산행이나 여행을 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먹을 것을 내놓고 먹거나 선상에 올라 바다구경을 한다. 아이들은 배 안 매점에서 새우깡을 사서 갈매기에게 던져준다. 연인끼리 섬을 찾은 사람들은 고물에 앉아 바다를 보며 사랑을 속삭인다.

여수여객터미널을 떠난 배는 돌산대교 밑을 통과했다. 배에 탄 손님만큼이나 많은 갈매기들이 배를 따른다. 아이는 두 봉지째 새우깡을 갈매기에게 주고 있다. 재미가 있었던지 아빠도 한 봉지를 사들고 아이 옆에 서서 갈매기를 부른다. 20여 마리 갈매기가 허공에 높이 올랐다.

바다에 떨어진 먹이를 잽싸게 낚아채 오른다. 40여 분이 흘렀다. 이쯤이면 새우깡을 가지고 놀던 아이도 흥미를 잃을 시간이 지났다. 새우깡을 가지고 갈매기와 놀던 십여 명 중 한 명만 남아 있다. 갈매기도 세 마리뿐이다. 다들 여객실 안으로 들어갔고, 갈매기도 오던 길로 돌아갔다.

▲ 여수항을 떠난 배를 따라 갈매기들이 쫓아온다. 아이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에 길들여진 녀석들은 바다에서 고기잡는 것보다 쉬운 길을 택했다.
ⓒ 김준
갈매기에게도 삶의 경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우깡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배를 따라왔던 갈매기 세 마리는 그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삶이란 늘 이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닐까. 이 배를 타고 섬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갈매기와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멀리 금오도가 보인다. 갈매기는 모두 돌아갔고, 금오도 섬산행을 하려는 사람들이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창 밖을 보며 서성거린다. 금오열도의 대표적인 섬산행은 개도의 봉화산과 금오도의 대부산-옥려봉-망산을 꼽는다. 봄바람에 갯내음을 느끼며 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를 보며 걷는 것이 섬 산행의 백미다.

안도는 섬을 둘러보는데 하루면 족하다. 그렇지만 섬과 바다가 갖춰야 할 것은 모두 있다. 우선 백금포의 모래해수욕장와 이야포의 몽돌해수욕장은 여름철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갯바위가 섬을 둘러싸고 있어 태공들도 즐겨 찾는다.

안도리 앞 '둠벙안' 갯벌은 갯벌체험 장소로 손색이 없고, 고개를 넘어 서고지의 아름다운 포구와 등대까지 손색이 없다. 여기에 가두리, 정치망, 고기잡이배 등 섬과 바다가 갖춰야 할 것이 두루 갖춰져 있다. 지금은 논농사를 짓지 않지만 예전에는 약간의 논도 있었다.

현대사의 아픔을 바다에 묻고

배는 1시간을 훌쩍 넘기고 두 시간이 채 모자라는 시간에 금오도를 거쳐 안도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한반도를 품은 호수마을이라는 표지석과 커다란 종대가 마을로 들어가는 양쪽에 버티고 있다.

하나는 동도와 서도 사이에 형성된 안도리가 한반도를 닮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고, 다른 하나는 1918년 안도 어업협동조합이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기 위해 세운 풍향대로 주민들은 이를 종대라고 부른다. 지금 종대는 지역 기업의 지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 1918년 안도 어업협동조합에서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기 위해 설치했던 풍향대로 주민들은 종대라고 부른다. 지금의 모습은 복원된 것이다.
ⓒ 김준
선착장을 지나 마을을 따라 걸으면 작은 갯벌이 있고 연못이 보인다. 이곳이 주민들이 '둠벙안'이라고 부르는 갯벌이다. 과거에는 바닷물이 흘렀지만 남쪽에서 밀려오는 조류에 의해 이야포 지역에 사주가 형성되어 동도와 서도가 연결되었다. 그 후, 태풍으로 자주 피해를 입자 이곳에 방조제를 쌓았으며 이야포에는 몽돌해수욕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안도리 구릉 중턱에 있던 집들까지 잠기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안도의 시련은 해방이 되고서도 이어졌다. 풍수쟁이의 이야기를 빌어 주민들은 기러기 섬인 안도가 호랑이 섬인 금오도 앞에 있어 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1998년 발행한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 1집>에 따르면, 당시 반란군으로 소탕 대상이었던 14연대의 남면 출신 일부 병력과 이를 진압하려는 5연대 사이에서 좌우익은 물론 다수의 민간인들도 피해를 입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진압군 5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다.

▲ 주민들은 이 사진을 '군에 입대하는 안도청년들을 환송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한다(안도리 회관)
ⓒ 안도리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안도에서 떠난 후 금오도 우학리 명OO씨가 일본인으로부터 정치망을 물려받아 어업활동을 했다. 안도 주민들은 1948년 법(귀속재산처리와 관련된 법으로 추정됨)이 제정되었으나 어장을 어업조합에 내놓지 않고 어장을 계속하자 강제 철거했다. 이에 반발한 명씨는 주민들을 군부대에 고발해 영창에 갇히는 등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군이 들어오자 명씨가 여수로 나가 안도에 좌익이 많다고 무고를 하기에 이른다. 신고를 받은 김종원(별명 '백두산 호랑이') 등 5연대는 부산과 여수를 오가는 연락선 동일호를 타고와 함포 사격을 하며 안도에 상륙해 주민들을 초등학교에 집결시킨 후 주민들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으로 분류하여 인민군을 찾아내라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대까지 끌려갔던 한씨와 초등학교 교사 이씨와 김씨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주민 40여 명을 결박하여 안도선창으로 끌고 가 11명을 처형했다. 이들은 대부분 좌익과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며 우익성향이 강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 미군의 오폭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이야포 해변, 지금은 몽돌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김준
안도의 아픈 기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0년 7월 21일 미군전투기의 오폭으로 이야포 앞 바다에서 피난민 350명을 태운 배가 침몰하여 150여 명이 사망했다. 더 끔직한 것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인지 시신들을 매장하지 않고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는 것이다(<오마이뉴스> 2006. 10.9,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 전투기 오폭… 참조).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면서 파도가 높아진다.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오늘 막배는 좀 일찍 뜰 거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일제강점기 풍부한 어족자원을 탐했던 무리들이 오갔을 이 뱃길.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아픔을 바다에 묻고 사는 섬사람들. 이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섬이야기] 전남 여수 안도 - 2 '수산정책, 어촌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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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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