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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묘(사적 125호) 어도(御道:왕이 다니는 길)의 복원이 잘못됐다고 보도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지정 유산이었던 만큼 어도의 변형에 대한 논란은 중앙 일간지에서도 상세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물적 문화재 복원의 중요성만큼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문화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보호다.

▲ 사진 오른쪽에 종묘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 황진태
문화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한 김성우 한양대 건축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는 <녹색평론> 1993년 1-2월호에서 "한국의 건축은 서양에서와 같이 건물 하나하나의 독립적 가치가 추구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건축물이 독자적인 가치가 없었다거나 전혀 추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건축물이 독자적인 자기추구 또는 자기실현의 입장보다 관계적 상황, 또는 공간적으로 더 큰 전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원칙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규정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러한 내용을 무시하고 건물의 독립적인 가치만을 문화재적 가치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현재 서울 중구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을 살펴보면 세운상가 자리에 220층(960m)짜리 한 채와 100층 이상이 5개, 50층 이상까지 포함하면 총 10여개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숲이 만들어진다.

▲ 세운상가는 청계천을 가로지른다. 청계천 복원사업에서 건물 용적률을 높이기 위해서 서울시 고위관료와 개발업자간의 뇌물사건이 있었듯이 세운상가 재개발은 녹지축 복원이 아닌 개발축 강화를 위한 몸살이 예정되었을 뿐이다.
ⓒ 황진태
이번 재개발을 주도하는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는 강북권의 랜드마크를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에 초고층 빌딩숲 조성에 방해가 되는 규제(90m 이상 건축제한), 심의, 허가절차마저 바꾸려 하고 있다. 평소 강력한 문화재 보호정책을 지향하는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국 대다수의 도시시정을 배우자는 시당국의 그간 홍보와는 달리 막상 개발이란 떡고물이 떨어지자 초고층 빌딩들이 병풍마냥 종묘를 둘러싼 섬뜩한 경관이 당국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듯하다.

세운상가가 도시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된 지난해 11월, 종묘 앞에 초고층 빌딩을 세운다는 발표가 나오기 두 달 전인 9월에 이미 이코머스(IC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초고층 빌딩이 종묘의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권고안을 보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후 이코머스는 적절한 대응을 못하였다.

▲ 재개발 계획은 세운상가 뿐만 아니라 주변지구까지 포함한다. 청계천 복원사업에서 나타났던 거주민에 대한 보상, 합의 과정의 배제와 충돌은 세운상가 재개발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부분이다.
ⓒ 황진태
그런데 균형발전추진본부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안에 종묘세계유산 보호관련 지속적 자문 및 사후관리를 위하여 '이코머스 관계자들과 E-Mail 등을 통해 업무협의를 추진하는 등 지속적으로 사후관리', '이코머스-코리아 및 전문가로 자문단 구성'을 명시해놓았다.

하지만 11월 당시 130층으로 기획된 초고층빌딩 계획은 5개월이 지난 후에는 220층으로 더 높이 기획됐다. 과연 이코머스의 권고안을 형식적이나마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세운재정비촉진계획안에 명시된 이코머스의 역할은 초고층빌딩을 세우기 위한 걸림돌에서 디딤돌로 바뀐 전시성 행정의 부속품이 되었을 뿐이다.

세운상가 부지에 세워질 초고층빌딩숲 뿐만 아니라 서울시는 용산역, 잠실, 마포 상암 DMC, 성동 뚝섬 등에도 초고층 빌딩을 세워서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기대한다고 하지만 여기저기에 초고층 빌딩을 세워서 과연 고유의 랜드마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기존의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63빌딩이나 남산타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초고층 스카이 라인을 더 세우자는 것은 랜드마크의 실효성도 의문시 될 뿐더러 결국에는 개발주의자들의 잇속을 챙기는 명분 밖에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런 개발 이익은 모두 대기업에게 떨어진다.

"세운 5구역의 경우 삼성건설, 대림산업, GS건설, SK건설 등 대형 건설사들이 시공권 경쟁에 뛰어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이데일리> 2006.11.30)

이렇게 '부동산 놀음'인 게 명약관화인데도 불구하고 균형발전추진본부는 세운상가 재개발사업의 공식적 명칭을 '세운상가 녹지축 조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래의 그림은 추진본부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청사진이다.

▲ 가로수 몇 그루를 세워놓고 녹지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빌딩숲이 더 어울리는 청사진이다.
ⓒ 서울시 균형발전추진본부
그러나 예상되는 결과는 재개발 사업의 명칭인 녹지축 조성과는 거리가 멀다. 청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빌딩으로 가득 차고, 여분의 공간에 가로수 몇 개를 세움으로서 '녹지축'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세운상가뿐만 아니라 서울의 랜드마크로 계획 중인 성동 뚝섬 서울숲(서울숲 자체가 과연 숲인가에 대한 비판도 있음을 상기하자. 서울숲을 방문한 서울시민이라면 황량한 벌판에 가로수 몇 개만 심어진 풍경을 기억해보라.) 근처에 세울 초고층 빌딩 또한 녹색을 내세울 때, 개발을 위한 위장막으로 전락시키려는 점에서 우려된다.

▲ 충무로에서 종묘쪽을 바라본 세운상가 경관이다. 건물 사이로 멀리 흐릿해 보이는 게 종묘 부근의 녹지다.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은 가로수 몇 그루만 심는 발상이 아닌 근본적인 녹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 황진태
사실 세운상가 철거 논의는 이미 논쟁을 펼친 바 있는 두 논자도 결국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마냥 폭주하는 서울시정에 두 손을 놓았다. 그러나 시민들마저 두 손 놓고 구경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종묘라는 우수한 문화재를 갖고 있는 문화시민들에게 초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종묘의 기묘한 풍경을 후손들에게 남긴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결국 시민들이 나서서 뒤틀린 계획을 바로 잡아야 한다.

검색사이트에서 종묘에 관한 뉴스를 검색한 결과, 종묘가 한미 FTA 반대운동의 출발점이라는 보도기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역동성이 바탕이 되어 비록 늦었지만 서울 도심 경관을 개발투기의 장이 아닌 시민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녹색공간과 고색창연한 문화재를 전승했다는 문화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날이 오길 기원해보자. 이것이야말로 세계에게 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서울의 랜드마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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