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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권위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 꼭 맞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방법으로 한자어를 비롯한 어려운 외래어가 흔히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금지를 알리는 안내문는 한자말이 많이 쓰인다. 이런 말은 사람들이 잘 알아듣기도 힘들다. 아파트, 학교, 관공서로 나눠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문자 권위주의'의 모습을 살펴본다. <필자 주>

"밟았다가 경비아저씨한테 혼났어요. 읽긴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아야지."

갓 대학을 졸업한 유영봉(28·남)씨가 한 말이다. 유씨는 지난 학기 ㄱ대학 도서관 개조 공사 중에 바닥에 붙어 있던 '양생중'이란 안내판을 밟고 지나쳤다 봉변을 당했다. 양생중이란 '콘크리트 굳히는 중'이란 뜻의 한자말이다.

유씨는 "대학도 이런데, 밖은 오죽 하겠어요. 손해 안 보고 살려면 한자 공부 좀 해야겠더라구요"하고 말한다.

잔디 발육상태? 수목고사?

대학 역시 권위를 강조하는 '금지', '금하다', '삼가' 같은 한자말을 쓴 표지판이 많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대학 본관 앞 잔디밭. ‘잔디의 발육상태’ 라는 죽은 말을 썼다.
ⓒ 김청환
'잔디 발육상태가 좋지 않아 당분간 출입을 금하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한 대학 광장 안내판. ‘음료수 잔여물’, ‘수목이 고사’라는 한자말이 있다.
ⓒ 김청환
'각종 음료수의 잔여물을 버릴 경우 수목이 고사되오니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한 대학교 본관 앞 광장에 있는 안내 팻말 문구다. '발육상태', '잔여물', '수목고사', '보드' 따위의 지나친 한자말이나 애매한 영어를 쓰고 있었었다.

이 학교 대학원생 김진희(27·여)씨는 "한자말만 보면 더 움찔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몰라서 저렇게 써 놓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위의 금지 안내문은 우리말로 쓰면 뜻을 금방 알 수 있다. 짧게도 쓸 수 있다. '잔디 발육상태가 좋지 않아 당분간 출입을 금하오니 양해…'대신 '잔디가 어려요. 들어가지 말아 주세요'라고 써도 된다.

▲ 한 단과대 안내판. ‘도장을 받아’하면 될 것을 ‘확인날인’이라 썼다. '부착', '임의철거' 같은 어려운 한자말이 있다.
ⓒ 김청환
▲ '2.'의 17자 모두 한자말이다.
ⓒ 김청환
대학 당국이 한자어 사용 역시 안내판 곳곳에서 나타난다. '확인날인을 받은 후 부착'(ㄱ대 단과대 사무실), '장애학생휴게실내 비장애학생 사용금지'(ㄱ대 학생지원부) 등이 대표적이다.

▲ 한 대학원 안내문. 제목에는 ‘인턴십’, 내용에는 ‘인턴쉽’이라 썼다.
ⓒ 김청환
한 안내문 안에서 '오류'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ㄱ대학 국제대학원 한 공고문 제목에는 '인턴십(바른말)', 내용에는 '인턴쉽(틀린말)' 하고 썼다.

대학생 이의복(25·남)씨는 "뜻도 잘 모르면서 외래어를 남용되고 있는 것 같다. 교양 있어 보이려 잘 알지 못하는 말을 쓰다 보니 오타도 생기고 어설픈 (외래어)공고도 많다"고 지적했다.

외국어로 된 대학 건물 이름 역시 늘고 있다. '글로벌'을 내세우는 한 대학은 최근 들어선 건물과 편의시설에 'Square'(스퀘어), 'Lounge'(라운지) 따위의 영어 이름을 지었다. 다른 대학들에도 '아펜젤러관', '알렌관', '다산관', '양현관' 같은 영어·한자말 이름이 즐비하다.

'녹화사업'에서 '의혈'까지... 혐오감 주는 이름도

사람에 따라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말이 대학 안 공고문에 버젓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 이선영(26·여)씨는 "작년 8월쯤 '담장 허물기 사업'이 유행일 때, ㅅ대 정문에 '녹화사업 중'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걸 봤다"며 "80년대 '녹화사업'을 떠올리게 해 불쾌했다"고 말했다. (녹화사업이란 5공화국 때 보안사가 군에 입대한 운동권 출신 학생들을 고문하고 취조한 반인권의 사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장준혁(29·남)씨는 "학교 안 비석에 '의로운 피'를 상징하는 '의혈'이라는 학교 별칭이 쓰여 있다"며 "선배들의 희생을 기리자는 의미는 잘 알지만 피를 의미하는 혈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오싹해지는 게 사실이다" 하는 생각을 밝혔다.

▲ 대학 학생회가 운영하는 ‘생활도서관’ 안내문. ‘폐관’, ‘기존’, ‘인력난’, ‘양해’, ‘원상복귀’, ‘해결’, ‘의향’ 따위의 한자말이 많다.
ⓒ 김청환
물론 행정당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생회가 운영하는 ㄱ대학 생활도서관에는 '폐관시간을…. 기존 운영위원들의 졸업, 휴학 등으로 인한 인력난 때문에 양해 부탁드리며, 새 위원 영입으로 인력난 해소되면 개관시간을 원상복귀…'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폐관시간, 기존, 인력난, 양해, 해소, 원상복귀 따위의 과도한 한자말이 쓰였다.

'생도관의 인력난을 해결해주실 의향이 있는 분은 ~로 문의주세요'라는 문구도 눈에 띈다. 생도관, 인력난, 해결, 의향, 문의 따위의 안 써도 되는 한자말이 쓰였다. '인력난을 해결해줄 의향'이라는 말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 '일할 생각' 정도면 충분하다.

학생들 역시 '공고문에는 한자말을 써야 권위가 산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권오성(28·남)씨는 "대학생들마저 안내문에 한자말을 마구 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쉬운 우리말 놔두고 (안내문에 한자말) 쓰는 것은 습관에 젖어서인 것 같다. 대학 교재 등에서 너무 흔하게 한자어 등 현학적 언어를 쓰니까 학생들이 영향 받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한 대학 총부무 안내판 담당자에게 전화하자 "홍보실을 경유해달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 대학 홍보팀에 전화해 대학 안내판의 지나친 한자말 사용해 대해 묻자 "다른 학교 취재하면 안되나"라고만 말했다.

<한겨레> 최인호 부장 "우리 말글 북돋는 것도 세계화다"

대학에서의 외래어 사용 문제에 대해 최인호 <한겨레> 교정교열부장은 "대학에서 배운 공문서 투의 말글을 대학 교직원이 돼서도 떨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부장은 이어 "말이란 버릇인데, 이 버릇을 시작하게 만든 대학사회는 자기반성을 통해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고 밝혔다.

특히 '세계화'를 내세우는 대학들이 영어로 공간이름을 짓는 것은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며 "이는 사대의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들어오는 것만 중히 여기기기보다는 우리 것을 북돋아 바깥 사람들이 좋다고 느끼게 하는 것도 세계화"라며 "우리다운 이름을 붙여 갈무리 하고 밖으로 나가야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오덕 선생에게 우리말 글쓰기를 배운 뒤 우리말 바로쓰기를 주장하는 안건모 <작은책> 편집장은 "지식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욱 쉬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자기들끼리만 이해하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안 편집장은 이어 "진보 지식인들조차 글로만 보면 반민중의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일제시대를 거쳐 미국의 반식민지 시대로 이어져 살아온 지식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본식, 영어식 말투를 쓰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덧붙이는 글 | '문자 권위주의를 말한다 - 관공서편'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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