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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서 만난 꿩의바람꽃, 이른 시간과 짙은 안개로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꿩의바람꽃.
그 섬에서 만난 꿩의바람꽃, 이른 시간과 짙은 안개로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꿩의바람꽃. ⓒ 김민수
섬에서 꽃에 대해 알았기에 육지로 이사한 후 섬으로 꽃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설렘이었다. 그러나 꽃샘추위가 꽃의 피어남만을 시샘한 것이 아니라 꽃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들까지도 시샘을 했는지 번번이 뱃길을 열어주지 않아 일정을 몇 번 바꾸고야 겨우 풍도라는 작은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풍도'의 '풍'자가 '바람 풍(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바람의 섬에서 만난 바람꽃'이라는 제목이 금방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요로운 섬'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주 가끔 여행 삼아 들리는 나그네들에게야 '바람의 섬'이 더 낭만적인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풍요의 섬'이어야 할 것이다.

그 섬에서 만난 노루귀 흰색, 꽃술이 붉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노루귀.
그 섬에서 만난 노루귀 흰색, 꽃술이 붉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노루귀. ⓒ 김민수
햇살이 짙은 해무에 숨어버리고, 해무가 안개비처럼 시야를 가린다. 선착장에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이런저런 꽃들이 피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나지 못하고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맘먹고 나온 출사길이니 기왕이면 군락지나 멋들어진 모델을 찾아야겠다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래도 눈길이 자꾸만 간다.

"그건 꽃도 아녀, 쩌그 올라가면 꽃이 얼마나 많은데."

꽃을 좋아 꽃을 찾아다니시는 분들에게 그 말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지 모른다.

그 섬에서 만난 노루귀, 은은한 분홍빛과 솜털 송송 작은 줄기가 예쁘다.
그 섬에서 만난 노루귀, 은은한 분홍빛과 솜털 송송 작은 줄기가 예쁘다. ⓒ 김민수
같은 노루귀라도 같은 노루귀가 아니 듯 섬에서 만난 노루귀는 특별한 자태로 피어 있었다. 이미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중의무릇, 대극, 산자고, 복수초, 현호색 등을 만나고 왔지만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자라준 꽃들에게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지천에 꽃이라 걸음걸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그렇게 조심해서 걸어도 밟히는 꽃이 있고, 밟히는 새싹이 있다.

그 섬에서 만난 변산바람꽃, 꽃샘추위와 비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그들의 몸부림을 본다.
그 섬에서 만난 변산바람꽃, 꽃샘추위와 비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그들의 몸부림을 본다. ⓒ 김민수
'미안하다, 얘들아 미안하다. 너희들을 위해서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너희들 곁으로 오면 안되겠구나.'

꽃샘추위와 비바람에 시달린 변산바람꽃은 성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꿩의바람꽃이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여건 속에서도, 여전히 당당하게 온 몸을 쫙 펴고 있는 상처 입은 변산바람꽃, 어느 새 이전보다 두터운 꽃잎으로 단장을 하고는 그 섬에 우뚝 서 있다. 그것이 꽃이다. 밟혀도 일어서는 것이 꽃이다.

그 섬에서 만난 대극, 섬 곳곳에 눈만 들어보면 보이는 대극은 수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이다.
그 섬에서 만난 대극, 섬 곳곳에 눈만 들어보면 보이는 대극은 수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이다. ⓒ 김민수
재미있게 생긴 대극, 수수한 빛깔로 치장한 대극, 화사하지 않아서 더 예쁜 대극이다. 이맘때는 초록의 빛 하나만으로도 신비스러울 때다. 막 마른 나뭇가지를 뚫고 피어오르는 새순이 그렇고, 낙엽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 그렇다. 무작정 꽃부터 피우겠다고 이파리도 없이 줄기만 쭉 올리고는 꽃을 피우는 꽃들도 아름답다.

이파리로 꽃을 두텁게 감싸고 피어나는 꽃, 여기저기 대극이 봄의 숲을 푸르게 수놓고 있다.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꽃이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화려하지 않은 인생도 인생인데 왜 사람들은 그리 화려한 것에만 열광하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멋지게 생각하며 살지 못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다. 더 화려하고 싶어, 눈길을 끌고 싶어 안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할 터인데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심, 그것을 버리는 날 나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얻을 터이다.

그 섬에서 만난 복수초, 벌써 복수초의 끝물이라니 가는 봄이 아쉽기만 하다.
그 섬에서 만난 복수초, 벌써 복수초의 끝물이라니 가는 봄이 아쉽기만 하다. ⓒ 김민수
올해는 복수초를 너무 빨리 만났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탓인지 개복수초는 만나지도 못했고, 복수초는 이파리를 제대로 못 봤고, 세복수초는 제주에서 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초 역시 꽃샘추위와 비바람에 시달려 끝물을 달려가고 있었지만 개중에 싱싱하게 피어나 봄날을 만끽하고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곳에는 피었다 하면 하나 둘이 아니라 군락지였다. 섬이라서 많이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섬에서 만난 산자고, 햇살 한 줌이면 화들짝 피어날 꽃, 그가 꿈꾸는 아침이다.
그 섬에서 만난 산자고, 햇살 한 줌이면 화들짝 피어날 꽃, 그가 꿈꾸는 아침이다. ⓒ 김민수

그 섬에서 만난 현호색, 비 온뒤 풀섶은 늘 이렇게 싱싱하다. 일액현상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풍경.
그 섬에서 만난 현호색, 비 온뒤 풀섶은 늘 이렇게 싱싱하다. 일액현상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풍경. ⓒ 김민수
피어날 적에 꽃 몽우리 터지는 소리가 '퍽!'하고 들릴 것만 같은 산자고, 앙다문 입술이 매력적인 산자고, 그는 햇살 한 줌만 비추어주면 피어날 것이다.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섬의 숲은 안개가 바람을 타고 유영하고 있었다. 전날 내린 비와 안개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슬을 만들고, 꽃 이파리들마다 제 몸에 남아도는 물기들을 배출한다. 말하자면 배설물인 셈이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답다.

그 섬에서 만난 등대, 방파제를 지키는 등대가 듬직해 보인다.
그 섬에서 만난 등대, 방파제를 지키는 등대가 듬직해 보인다. ⓒ 김민수
누군가 그 섬에 남아 사계절 피어나는 꽃을 육지로 날려 보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닷가를 끼고 걷는 길가에서 바라보아도 육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꽃들, 최소한 경기도권을 벗어나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야만 겨우겨우 만날 수 있는 꽃들이 지천이다.

바다와 섬과 등대, 그들은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서로가 상대편 없이는 밋밋할 수밖에 없는 단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토록 잘 어울리는 것일까? 저 등대 불빛만큼이나 환하게 숲을 밝히는 작은 들꽃들, 그 섬에 그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풍도'라는 지명이 그들로 인해 붙여진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만난 작은 섬, 갈매기들이 떠남을 아쉬워하며 바다 위를 난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작은 섬, 갈매기들이 떠남을 아쉬워하며 바다 위를 난다. ⓒ 김민수
돌아오는 길, 작은 섬들이 많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작은 섬, 하루 종일 기다렸던 해가 바다에 은빛으로 부서진다. 저렇데 바다에 산산이 부서지느라 그 섬 숲 속은 종일 안개에 쌓여 있었는가 보다.

돌아오는 길, "그건 꽃도 아니여, 지천으로 피었다니까"하는 말이 귓가에 머문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섬을 소개할 때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그 섬에 가면 꽃이 너무 많아 꽃이 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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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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