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57) 전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이 무소속 출마에서 민주당 출마로 선회한 배경을 둘러싸고 지역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당초 김홍업씨의 무안․신안 보궐선거 출마 결심을 이끈 사람은 김씨의 40년지기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윤흥렬(58) EtN TV 대표이다. 윤 대표는 또한 출마를 결심해 무소속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김씨를 민주당 입당 쪽으로 선회케 한 장본인이다.
지난 3월초만 해도 윤 대표는 기자에게 김씨의 무소속 출마를 공언했다. 그는 기자에게 “홍업씨가 민주당 출마는 당에도 부담이고 통합에도 보탬이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무소속으로 나선다는 생각이다”고 밝혔다. 김씨의 무소속 출마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김홍업씨 “지더라도 홀로서기 위해서는 무소속으로 나가겠다”
그러나 윤 대표는 처음부터 김 전 이사장에게 '민주당적 출마'를 적극 권유했다. 김홍업씨와 함께 대선, 총선 같은 큰 선거를 여러 번 치러본 선거전문가인 윤 대표가 사전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였다. 윤 대표는 "김홍업씨가 민주당으로 출마하면 당선 안정권인데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6 대 4 정도로 불리하게 나온다"면서도 "그러나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 바닥의 전문가인 윤씨가 민주당적 출마를 권유한 것은 친구이자 후원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윤 대표 자신이 민주당원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아버지(DJ)가 만든 당이고 그것이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떨어지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에게 엄청난 데미지(상처)를 입히게 된다.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려면 민주당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김홍업씨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윤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으로 나가서 (국회의원이) 된들 당에 신세만 지고 결국 아버지 그늘에서 뼛골 팔아먹은 자식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겠냐. 지더라도 홀로서기 위해서는 무소속으로 나가겠다.”
그렇게 해서 김씨는 지난 3월 15일 무소속으로 예비후보 등록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얼마 안 되어 무소속 출마를 접고 민주당에 입당해 '전략공천'을 결정한 민주당으로부터 23일 공천장을 받았다. 이에 앞서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21일 김씨에 대한 전략공천 방침을 발표하면서 “혈연관계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당의 특수관계가 고려됐다”고 말했다.
김씨의 심경 변화에는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집요하게 설득한 윤 대표와 DJ의 장남(김홍일 전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그리고 이 지역 의원이었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적극적 권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장남과 차남에게 각각 지역구를 물려준 두 사람의 정치행위에는 지역구 대물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라 동교동계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고초를 함께 한 '동지적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권노갑 민주당 고문의 '남순강화' 메시지?
DJ 비서실장 출신인 권씨는 DJ가 정계를 은퇴하자 DJ로부터 물려받은 지역구(목포)를 김홍일 전 의원에게 되물려준 바 있다. 역시 DJ 비서 출신인 한 전 대표 또한 목포와 무안․신안이 분리되면서 DJ의 고향에서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자신의 의원직 상실로 보궐선거 지역이 된 자신의 지역구에서 김씨가 출마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지난 2월 특별사면(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권씨는 3월초 어머님의 위폐를 모신 전남 목포의 한 절을 찾았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외아들이었기에 권씨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남달리 애틋했다. 오랜 수형생활에서 풀려난 아들이 어머니 영전부터 찾는 것은 당연한 도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김에 자신이 영어의 몸일 때 찾아준 지역 정치인들을 만나 인사를 닦았다.
권씨는 아울러 이 지역을 방문하는 길에 윤흥렬 대표와 무소속 출마 결심을 굳힌 김홍업씨를 만나 "무슨 소리냐"며 "아버지가 만든 민주당으로 나가야 한다"고 적극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지역 정치인들에게 김씨가 당선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권씨의 남도 방문은 권씨가 김홍업씨의 출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일종의 동교동판 남순강화(南巡講話)의 메시지로 읽혔다. 이 지역 정치권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동교동계가 정계복귀하는 신호탄으로 보는 성급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목포여고 영어교사였단 권씨는 출소후 현재 주3회 강남의 한 영어학원에 다닐 만큼 영어에 푹 빠져 있고, 이 학원을 마치면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해 자원봉사 통역으로 제2의 인생을 살 계획이다.)
권씨는 지난 93년 1월 김대중 총재가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훌쩍 떠나자 그해 2월 자신의 지역구(목포․무안․신안)를 장남 김홍일씨에게 넘겨준 장본인이다. 사실 목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그런 점에서 권씨 또한 김 전 대통령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셈이다.
가신(家臣)들의 국회 진출 선수가 빠른 상도동과 달리 동교동의 맏형이자 비서실장인 권씨는 정치에 입문한지 30년만인 1988년에 회갑이 다 되어서 초선의원이 되었다. 김 전 대통령의 오랜 해외망명과 투옥 등으로 국내 대리인 역할을 맡느라 국회에 진출할 시간이 늦은 것이다. 따라서 늦게 본 지역구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강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제주 회동에서 "출마 흔쾌히 돕겠다" 약속
물론 지역구가 전유물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보좌진들이 자기가 모시던 의원과 금뱃지를 놓고 사생결단을 벌인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비추어 자기가 모시던 정치지도자가 은퇴하자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차마 열어주지 못했던 2세의 정계 진출길을 터주기 위해 지역구를 넘겨준 것은 미담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지도자의 아들을 떠나 고난을 함께 한 '동지'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권 고문과 마찬가지로 김홍업씨의 출마를 적극 지지했다. 특히 무안․신안은 한 전 대표가 불법 정치자금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된 보궐선거 대상지역이라는 점에서 한 전 대표의 의사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는 “김홍업씨는 동교동계 내에서 가장 친한 후배”라며 “김씨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한다”고 말해 김씨가 민주당적을 갖고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한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의원직이 상실된 직후에 제주도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제주도에 말목장이 있는 윤흥렬 대표가 한 전 대표를 만나 김씨의 출마 문제를 정식으로 상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한 전 대표는 윤씨에게 홍업씨를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후 한 전 대표는 김홍업씨가 무소속으로 예비후보 등록을 하자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민주당을 키워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팔았는데, (민주당이) 김홍업씨를 거부하면 유권자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동교동에 누가 안되고, 정치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민주당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으면 한다.”
김씨가 무소속 출마를 하면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민주당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4․25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다른 지역은 몰라도 전 대표의 지역구인 무안․신안에서 후보를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민주당 후보와 무소속 김홍일씨의 대결이 불가피하다.
'전략공천'은 김홍업씨와 DJ의 '후광' 필요한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한화갑 전 대표의 지적대로 민주당은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특수관계'를 내세워 지지를 호소해 왔다. 문제는 그런 민주당이 '특수관계인'의 아들과 싸우는 모습을 지역 주민들과 일반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였다.
김홍업씨는 선거에서 김 전 대통령의 지론대로 '범여권(열린우리당+민주당+신당) 대통합'의 역할론을 들고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전력을 다할 경우 김씨가 낙선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민주당으로서는 독자 후보를 내세워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이고 지면 통합의 주도권을 잃을 판이었다. 결국 김홍업씨에 대한 민주당의 '전략공천'은 당선이 목표인 김씨와 여전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광이 필요한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인 셈이다.
따라서 뭐니뭐니 해도 무소속에서 민주당 출마로 선회한 직접적인 배경은 당선 가능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광주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초 대통합을 명분으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던 김홍업씨가 21일 민주당에 입당해 민주당 후보가 된 것은 민주당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 2위로 나와 낙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은 가상대결에서 민주당 특정후보에게 6 대 4 정도로 열세라는 김홍업 캠프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 비추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김씨는 낙선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얼굴에 먹칠하고 그 자신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당선이 중요하다는 주위의 설득에 무소속 출마 결심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지역선거에서 소지역주의 바람이 불 경우, 이 지역에서 50% 지지도를 보이고 있는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다 해도 승리를 낙관할 수가 없다는 지적이다. 무안 유권자수가 신안보다 많은데 그동안 국회의원은 신안 출신(한화갑 전 의원)이 해왔다.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과 이 지역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 움직임도 변수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과 이 지역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 움직임도 변수이다. 당장 유력한 경쟁자인 이재현 전 무안군수는 물론 아태평화재단 출신의 김호산 통일농수산사업단 기획위원장도 “공당인 민주당이 사당화되고 있다”며 이미 탈당과 함께 무소속 출마 의지를 밝혔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26일 강성만 후보자를 무안․신안 지역에 공천했다. 강씨는 한화갑 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당적으로 당선되기는 어렵겠지만 김씨를 끌어내릴 여지는 적지 않다.
김홍업씨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민주당에 부담을 안주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왕 선거에 나갈 바에는 아버지 얼굴에 먹칠(낙선)을 하지 않기 위해서 민주당으로 출마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로서는 '안전한 길'을 택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길도 어느 것 하나 안전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설령 김홍업씨가 승리를 거둔다 해도 '상처뿐인 영광'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