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람 냄새를 제대로 맡으려면 피맛골로 가야한다.
사람 냄새를 제대로 맡으려면 피맛골로 가야한다. ⓒ 강기희
지난주 금요일(23일) 늦은 오후 오랜만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울을 떠난 지 몇 해 되니 은근히 서점이라는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퇴근 무렵이라 그런지 서점엔 책을 고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예 통로에 편안히 자리 잡고 책을 읽는 이도 많았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피맛골

책 고르는 손들이 곱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한아름 안고 가는 한 여성의 표정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 행복해 보였다. 서점에서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예전 마을 사람들이 먹었던 샘물을 깔고 앉은 교보문고를 나와 피맛골로 갔다. 피맛골은 서민들의 쉼터이자 해방구이다. 그 역사는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육전 거리 뒤편 골목인 피맛골은 적어도 더러운 꼴 보지 않고도 길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육전 거리는 경복궁이 인근에 있어 언제나 양반들 차지였다. 넋 놓고 길을 가다 보면 "훠이, 물럿거라!"라는 호령을 따르지 못해 곤죽이 되도록 맞기도 하는 곳이 대로였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고 보니 더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당시의 계급구조상 양반과 대적하기란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힘든 상황이었다. 천민처럼 사람대접조차 못 받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나마 도성 거리를 온전히 걸어다닐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대로에서 양반에게 머리 조아리며 굽실거리는 일을 하고 나면 꼭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존경받지 못하는 인물이라면 욕설도 섞었다. 자연스럽게 양반이 아닌 자들은 큰길로 나서지 않았다.

양반사회를 향해 저항할 수 없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양반입네 하고 꼴사납게 구는 인간들 눈에 담지 않으면 심관 편하다 싶었다. 그들은 대로 대신 좁은 골목을 이용했다. 거드름 피우는 양반들과 마주치지 않으니까 살 것 같았다.

피맛골은 그런 연유로 생겨났다. 사람들은 그 길을 '말을 피해다니는 길'이라 하여 피맛(避馬)골이라 불렀다. 피맛골을 이용하는 이들은 대개 중인이나 상인 등의 평민들이었다. 길이 생기면 주막이 생기는 법. 피맛골 안으로 서민들의 밥상과 술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서민들은 부조리한 세상과 양반들을 향해 거침없는 말을 쏟아냈다. 허균과 김종직 같은 인물이 대로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날도 그랬을 것이다.

"민심이 천심인디 세상은 왜 이런디야."
"암튼 더러운 세상은 분명혀."


긴 역사를 간직한 피맛골은 해방이 되고서도 살아남았다. 종로 1가에서 5가까지 이어지는 피맛골은 청진동과 인사동, 낙원동을 끼고 있어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피맛골 기행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가장 좋다. 그 시간쯤이면 아는 이들을 만날 확률도 높다. 우연한 만남이 긴 밤을 새우게 하는 곳이 피맛골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가야한다.

피맛골의 시작은 광화문 교보문고 후문을 나서면서부터이다. 피맛골에 들어서자 만날 수 있는 집은 '열차집'이다. 녹두빈대떡과 굴양념 간장만으로도 막걸리 몇 병은 순간 비워지는 곳이다. 녹두빈대떡은 열차집의 주무기.

얇은 지갑이라도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곳이다.
얇은 지갑이라도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곳이다. ⓒ 강기희
삼치구이 하나만 있어도 하룻밤이 행복하다.
삼치구이 하나만 있어도 하룻밤이 행복하다. ⓒ 강기희
열차집을 찾는 이들은 광화문에 직장을 둔 언론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이다. 간혹 젊은 사람들도 보이지만 중장년층이 즐겨 찾는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빈대떡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다. 술과 음식보다는 옛 추억을 파는 집이라 해도 무방하다.

피맛골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해방구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삼치구이 익어가는 소리가 지글지글 난다. 낮엔 반찬으로 저녁엔 술안주로 쓰인다. 골목은 삼치 굽는 소리와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좋은 향수 뿌리고 비싼 옷 입은 사람은 얼씬도 하고 싶지 않은 곳, 피맛골은 돈 좀 있다며 잘난 체하는 사람을 그렇게 밀어낸다.

네가 내 눈에 뜨이지만 않았어도
잿빛날개를 힘차게 팔락이며 열정의 인생을 보냈겠지
눈치도 없는 하루살이

네가 내 눈과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육만의 종식번식에 성공했겠지
한심한 바퀴벌레

그랬는데, 오늘도 나는 큰길로 나서지 못하고
피맛골을 따라 교보문고에서 인사동까지 걸었다

- 강기희 시 '먹이사슬' 전문


한때 피맛골은 서러움의 길이었다. 큰길로 나서지 못하는 비극은 여기저기에 있었다. 슬픈 영혼들은 피맛골을 걷다 각자의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서점에서 만난 이들의 표정이 다 비슷하듯 피맛골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들 비슷하다. 사라진 낭만을 찾아오거나 추억에 젖은 이들의 휴식처이자 해방구가 되는 까닭이다. 가벼운 주머니 털어 정과 낭만을 나눌 수 있는 곳은 피맛골이 유일하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종로구청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피맛골은 여기에서 한번 끊어진다. 길 건너편엔 낯선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오피스텔 건물인지 높이가 만만치 않다. 1층에선 스포츠센터 회원을 모집하느라 불을 훤히 밝히고 있다.

건물이 들어선 자리엔 '실비집'이 있었지만 어디론가 사라졌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따라 1층으로 오르는 재미가 있던 집이며 낙지볶음이 전문이었다. 저녁 무렵이면 자리가 없어 길게는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겨우 말석 하나를 차지할 수 있는 집이었다.

한번 먹고 나면 또 찾게 되는 집인 '실비집'이 재개발로 사라졌다. 그 안에 남겨 두었던 수많은 추억이 신축 건물 바닥에 깔려버렸다. 돈이 없어 낙지볶음 반 접시를 시켜놓고 콩나물만 연방 시키던 청년의 꿈마저 사라지고 없다. 자본의 힘이 이렇게 무섭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주점거리.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주점거리. ⓒ 강기희
종로 금강제화 뒷골목에 있는 피맛골 낙서판.
종로 금강제화 뒷골목에 있는 피맛골 낙서판. ⓒ 강기희
건물이 들어서면서 청진동 일대의 피맛골은 형체도 없다. 중앙장의사 간판을 뒤로하고 건널목을 건너면 그 걸음이 자연스레 피맛골로 이어졌는데, 그 입구를 거대한 건물이 막아섰다. 길을 건너 돌아보니 중앙장의사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숱한 사연들이 자본의 힘에 의해 사라지고

골목에 들어가야 '시인통신' 흔적을 찾을 것이지만 길은 어디에도 없다. 청진동 일대가 재개발된다고 할 때 '시인통신' 한귀남 누님이 한 걱정을 했었다. 재개발 소문이 돌던 시절 화재까지 났던 터라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80, 90년대를 거치면서 시인통신을 찾지 않은 문화예술인은 예술가도 아니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언제든 찾아가 냉장고를 뒤져 맘 놓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시인통신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내고 없으면 말았다.

외상이라는 말도 민망할 정도였던 시절 시인통신은 예술가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술이 과하다 싶으면 2층에 있는 방에 들어가 잠을 잤고, 술이 깨면 다시 술병을 찾았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는 경찰과 최루탄 가스를 피해 숨어들던 곳이기도 했다.

"남은 건 손때 묻은 예술가들 작품뿐이야."

오래전 누님은 시인통신에 남긴 것들과 행사장에서 챙겨온 걸게그림 등이 유일한 재산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작품만으로도 작은 전시 한 번은 할 수 있을 정도다.

누님의 화통한 웃음이 사라진 청진동은 쓸쓸하기만 했다. 시인통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지만 분위기가 피맛골만 할까 싶은 의문은 든다. 사라진 모든 것들에 대한 묵념이 필요한 곳 청진동 피맛골엔 숱한 사연만 구구하게 거리를 떠돈다.

통째로 사라진 청진동 피맛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종로YMCA에서부터 이어지는 피맛골로 갔다. 금강제화 뒷골목은 비교적 젊은 층들이 찾는 곳이다. 간판 이름도 주점이 많고 이웃인 인사동의 영향을 받은 터라 음악도 들려나온다.

피맛골을 따라 가다가 샛길로 들어서면 온통 주점뿐이다. 이른바, '주점골목'이다. 그 길의 끝에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막걸리집 '와사등'이 있다. 눈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와사등이란 간판은 좀체 찾기 힘들다.

집은 언뜻 보아서 다 쓰러져가는 가정집 같다. 입구는 여전히 나무판자로 만들어져있으며 냄새 나는 화장실도 그대로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 더 반가운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늘 그렇듯 어두침침하다. 벽은 낙서로 채워져 있다.

아무 자리나 앉으면 막걸리와 고갈비가 나온다. 기본 상차림이다. 고갈비는 고등어구이가 아니라 강원도에선 '새치'라고 하는 임연수 구이다. 사람들은 와사등을 '전봇상집' 또는 '고갈비집', '할머니집'이라 한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라 이름이 중요한 집이 아니다. 벽에 그려진 낙서만 읽어도 며칠은 걸린다. 와사등을 찾는 이들은 기념으로 낙서 하나씩 한다. 추억을 만들고 확인하는 집이기도 하다.

전봇상집이라고 알려진 할머니 집의 간판. 실내에 있다.
전봇상집이라고 알려진 할머니 집의 간판. 실내에 있다. ⓒ 강기희
곱게 머리를 빗어넘긴 고갈비집 할머니. 피맛골의 역사이다.
곱게 머리를 빗어넘긴 고갈비집 할머니. 피맛골의 역사이다. ⓒ 강기희
낙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증거물이다. 요즘의 낙서는 '사랑'이란 말이 많이 들어갔다. 오래된 낙서엔 어김없이 '민주'와 '자유', '독재타도', '살인마 전두환' 등의 구호가 적혀있다. 오래전 와사등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모든 게 변해도 이곳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낮은 소리로 숨죽여가며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골목으로 급박한 구둣발 소리가 나면 노래를 멈추고 술을 마셨다. 젊은이들이 분노하며 울분을 토하던 자리는 여전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와사등을 찾은 그날 중년의 손님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양복차림의 그들은 지난날을 추억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와사등을 찾는다고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와사등만큼 많은 사연과 추억이 있는 곳은 없다.

주인 할머니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자 할머니다. 예전엔 어머니였고, 요즘엔 할머니가 된 것이 이 집에서 변한 것이라면 유일하다. 할머니에게 술집을 연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었다.

"한 50년 되었나?"
"요즘도 외상 하는 사람들 있나요?"
"요샌 별루 없어, 다들 먹고 살만 하잖어."


하긴 요즘 아무리 살기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지만 막걸릿값 정도를 못내 외상 하는 시절은 아닌 것이다. 학생증이나 시계, 책 등을 맡기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은 분명했다.

"나무 전봇대가 보이지 않네요?"
"하도 기름이 많이 묻어서 얼마 전에 뽑았어."
"기름요?"
"사람들 손때가 다 기름이지 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봇대를 만졌으면 그게 기름이 되었을까. 상상도 되지 않은 일이지만 실제 나무로 된 전봇대는 사람들의 손때로 반질반질했다.

"전봇대가 사라졌다니 아쉽네요."
"전봇대로 인해 불날까 봐 그런 거니 어쩌겠어."


기름 묻은 전봇대가 혹여나 도화선이 될까 싶어 뽑았다니 잘하셨다고 말해주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집 만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야 그러고 싶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힘없는 서민이 거대한 자본과 권력을 이기기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는 할머니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영화 <오 수정>에 출연하셨을 때보다 더 젊어 보이는 걸요?"
"에이, 이 나이에 젊어 보이면 얼마나 젊어 보이겠어."


곱게 화장한 할머니는 농이 아니라 부끄럼 타는 새색시처럼 고왔다. 그 무렵 한꺼번에 손님을 몰려왔다. 이리저리 앉을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와사등을 나왔다.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길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다. 그렇게 피맛골의 어느 봄날은 오고, 가고 있었다.

구석자리에 앉아 숨 죽이며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
구석자리에 앉아 숨 죽이며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 ⓒ 강기희

#교보문고#피맛골#경복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