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종철이가 그랬어요.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뭐 사 달라고. 그럼 웃기지 말라고 했죠. 만우절에 자기 생일이라고 하는데, 그냥 장난인 줄 알았어요. 죽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됐죠. 그래서 가끔 종철이 생일에 가봐요. 가족 분들은 매년 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4월 1일,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을 찾은 이유였다. 박종철 열사의 학교 선배 남택범씨의 말을 듣고, 유족 취재가 가능할 거라는 '얄팍한' 기대에 부풀었다.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2시 경, 안내도를 통해 확인한 박종철 열사의 가묘 번호는 31번. 기대는 적중했다. 가족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철이에 대한 관심 편중도 문제"
임진강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진 젊은이의 생일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래도 고인과 특히 가까웠던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청객'을 편하게 맞아줬다. 기꺼이 자리 한 켠을 양보했고, "먹다 남은 김밥"이라며 미안해했다. 미안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외부 반응에 이제는 초연해요. 87년 이후 3-4년 동안 워낙 별별 일을 다 당했잖아요. 우리는 우리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죠. 어머니가 워낙 강단이 있으신 분이라 오히려 저희가 믿고 의지하는 편이죠."
박종부씨(박종철 열사의 형)는 담담한 어조로 "아직 건강에 별 이상이 없으셔서 다행"이라며 "다만 지금 남영동 보안분실 자리에 건립되는 박종철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잘 정리하고 싶으신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친절하게 음료수를 권하던 어머니 정차순씨, 하지만 아들 얘기에 이르러서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이야기할 것 없어. 먼저 아들 보낸 사람이 무슨. 새삼스레 얘기할 게 뭐가 있겠어. 인자는 자꾸 되새기기 싫어요. 좀 조용하게 살고 싶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워낙 차분하고 자기 소신이 강해, 살아 있었다면 선생님이 돼 있을 것 같다. 언뜻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박종부씨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씨는 말했다.
"입구 안내판이 2003년에 세워졌어요. 그때가 81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91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4, 2005, 2006년… 자꾸 죽으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요? 여기 모셔 있는 분들 중 3분의1이나 알까요?"
- 너무 관심이 편중된다는, 다른 분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당연하죠."
'김기욱'이란 이름을 처음 듣다
'김기욱'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 중 하나다. 인천역 노동자로 노래패 활동 등 노동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 간암으로 39살의 나이에 운명하기 직전에도 "나는 죽지 않는다"고, "살아서 할 일이 너무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넸다는 사람이었다.
'생일'로 묘역을 찾은 박종철 열사를 배웅하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알려준 이름이었다. '기일'에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김기욱 동지 추모사업회'. 2002년 4월 2일 사망한 노동문화일꾼 묘소 앞에서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묵념을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고인의 아내 박순자씨는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힘이 되는 분들이다. 매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니 너무 고마울 따름"이라며 "그런데 세상이 너무 빨리빨리 변하는 것 같다. 현실이 너무 경제 중심으로만 흘러가니까, 없는 사람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직 돈, 돈, 돈.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모두 '민주'의 진행형일진데, 세상은 어느새 '유물'처럼 이들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김기욱 동지'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추모사업회 강원덕 회장은 "이제 활동가들 나이가 꽤 된다. 대부분이 40-50대로 여기 모인 사람들은 구시대 사람들에 속하게 됐다"면서 "신규 채용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만 해도 1989년에 대거 채용한 이후 극히 미미한 수준으로 사람을 뽑는다"고 말했다. 이날 추모식에서 유독 눈에 띈 '젊은 피' 최수범씨(27세)는 "여자 친구가 당연히 싫어하죠"라며 이렇게 말했다.
"회사 다니면서 평범히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노동운동을 하려고 그러냐고 반대하죠. 사실 머리띠 매는 것을 안 좋게 보잖아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잖아요. 안타깝죠. 너무 개인주의로만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오늘 여기 처음 왔는데요. 이렇게 열사들이 많은 줄 몰랐어요. 제가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가슴이 뭉클했어요. 조그만 힘이라도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민족민주열사 묘역의 '현재'는?
그렇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열사' 또는 '민주인사‘들은 이곳에 얼마나 있을까. 민족민주열사 묘역의 '현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쉽지 않았다. '묘역’이라기보다 민족민주열사가 많은 공원묘지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정 지역 안에 열사들이 모셔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묘소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입구 안내도만으로는 찾기가 힘들었다. 안내도에 나타난 81개 묘소 중 3개 묘소는 결국 찾는 데 실패했다.
특히 위령탑을 중심으로 우측에 흩어져 있는 묘소들과 달리 좌측 산 정상 부근에 있는 11개 묘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참배조차 쉽지 않았다. 도보로 걸린 시간은 약 50분. 관리 사무소 관계자는 "묘 자리가 확보되지 않아 따로 모시게 된 것"이라고 밝혔으나, 김진균, 박동진, 전응재 등 2003년 이후 안장된 열사들은 오히려 입구에서 가까운 경우가 많아 이같은 해명에 의구심을 자아냈다.
게다가 그들의 약력과 삶을 기록한 자주색 표지판도 아직 세워지지 않은 묘소가 많아, 일일이 비석을 확인해야 구별이 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강연임, 금진현, 김미영, 박기상, 오경환, 이경환, 이정미, 이종대, 임혜란, 정낙현, 조용술, 주우길, 최종운, 최종진, 홍성엽 등 15개 묘소에는 '열사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고, 이중 안내도에 나타난 9개 묘소까지도 비석만 세워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안내도에 2003년 이후 안장 현황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아,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라 지칭하기에는 허술한 구석이 엿보였다. 강지연, 권재혁, 김남식, 김미영, 김진수, 김태환, 박상윤, 엄성준, 오덕환, 이정미, 이종대, 이형관, 전용철, 전응재, 제종철, 조용술, 홍성엽 등 적어도 17개 열사 묘소가 묘역 안내도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최소 98명의 민족민주인사가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일반인들이 안장 현황을 정확히 전함으로써 참배를 원하는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조속한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잊혀지는 열사가 하나 두 늘어난다는 것은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박종철 열사가 누구죠?"
어느새 ‘박종철’이란 이름도 잊혀지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노동운동을 반대한다는 최수범씨도 "전태일은 알지만, 박종철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친구 안성규씨도 마찬가지였다.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의 말도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지난 1월 13일에 종철이 모교인 부산 혜광고에서 추모제를 열었어요. 박종철 인권상을 받은 사람들도 행사에 참석했는데, 자기들끼리 '박종철이 누구냐'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요. 안타까웠죠. 금강산에 간 적이 있는데, 지도원이라고 하죠? 젊은 지도원들이 박종철을 더 잘 알고 있더라구요. 누구 잘못이겠어요. 우리 모두의 잘못이죠."
6월 민주항쟁 20년. 우리는 무엇을 기념해야 할까. 인천지역 노래패 ‘철의 노동자’에서 활동하는 황승미씨의 말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기념한다는 모임이나 사업이 많은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현재 문제들과 맞물리도록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봐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합니다. 6월 항쟁 20년이 '비석처럼' 기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 | | 박종철 열사는 누구? | | | |
| | ▲ 박종철 열사 가묘 | ⓒ이정환 | 온 국민들의 마음에 6월 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핀 박종철. 그는 1965년생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저 모범생으로 보였던 박종철은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자신을 투신한다.
활발한 학생회 활동으로 3학년에 이르러서는 과 학생회장에 선출됐고, 1986년 4월에는 청계 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갑자기 하숙집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체포된 박종철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인 박종운의 거취를 알아내려는 잔혹한 고문에 의해 오전 11시 20분 숨지고 만다.
독재 정권은 단순 쇼크사로 사건을 축소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치안본부장의 발표가 부검의 소견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면서 '고문 의혹'이 확산되자, 경찰은 고문사를 공식 인정하고 관련 수사관 2인을 구속했다.
하지만 공범 3명이 더 있다는 자백을 받고도 수사를 종결하려던 사실이 그 해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이로써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확산,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이와 관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올해 발간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저자 김정남) 서문에서 함세웅 신부는 '박종철과 6월'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희생을 감수했던 숭고한 물결 속에 박종철이 있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 던지고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지들을 지키다 홀로 세상을 등진 그의 죽음으로부터 6월 민주항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쟁 기간 내내 박종철은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 이정환 | | | | |
| | 모란공원 '열사'들의 평균 나이는? | | | | 1일 경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표지판이 있는 묘소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은 평균 몇 년의 생을 이 땅에서 보냈을까. 최근 세상을 떠난 분들을 포함했는데도, 결과는 '청년'의 나이였다. 34세. 어쩌면 우리는 각자 절반 정도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은 그 명단(가나다 순, 괄호 안은 사망 당시 나이).
강민호(25) 강희철(41) 고재욱(21) 고정자(미상) 권희정(23) 김경숙(21) 김기욱(39) 김남식(81) 김말룡(69) 김병곤(37) 김상원(33) 김성수(18) 김시자(35) 김영자(50) 김종하(28) 김진균(67) 김진수(22) 김처칠(35) 김태환(39) 남현진(21) 류정하(25) 문송면(15) 문익환(76) 민병일(39) 박동진(42) 박래전(25) 박영진(26) 박종철(22) 배동복(36) 석광수(30) 성순희(55) 송광영(27) 엄성준(35) 우종원(23) 이경환(19) 이덕인(28) 이재식(37) 이형관(25) 임혜란(28) 전태일(22) 정성범(31) 제종철(35) 조영래(43) 조정식(25) 조현식(33) 진철원(20) 천덕명(38) 천세용(20) 최명아(35) 최웅(29) 최응현(21) 최종길(42) 한경석(40) 한상근(26) 한희철(22) 이상 79명. / 이정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