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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닝의 ‘칭하이성 박물관’ 앞 수석 시장
시닝의 ‘칭하이성 박물관’ 앞 수석 시장 ⓒ 오창학
칭하이성 박물관 광장은 수석 판매상들로 가득하다. 어느 강에서 들어왔는지 10톤은 족히 됨직한 바위들을 트럭 위에 올려놓은 채 구매자를 찾느라 한창이고 광장 테두리는 크고 작은 수석들로 즐비하다. '공룡알'이라고 우기는 돌도 있고 동식물의 형상을 한 기괴한 돌도 흔하다. 취미가 있는 이들에겐 눈이 돌아갈 광경인데 내겐 그 돌이 그 돌이다. 하긴 호탄강에서도 옥석을 구분하지 못한 눈인데 오죽하겠나.

시닝 박물관. 일본이 건설비의 반을 댔다. 3000년 전의 포크와 나이프
시닝 박물관. 일본이 건설비의 반을 댔다. 3000년 전의 포크와 나이프 ⓒ 오창학
수석 시장은 남의 집 일처럼 보고 칭하이성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건설비용 1억 위안 중 5000만 위안을 일본이 댔다는 안내 문구가 있다. 왜 이토록 일본은 동양 고대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현재를 사는 이들의 의도에 맞춰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내실 있게 전열된 전시물 앞의 안내판에는 일본어가 병기되어 있다.

전시물 중 3000년 전에 쓰였다는 나무 포크와 나이프가 인상 깊다. 세월과 지역을 넘어선 유사문화를 재확인하는 순간이다.

현관 가판대에서 쓸만한 책을 발견하신 교수님이 판매원을 찾았으나 점심 먹으러 갔단다. 어찌할까 싶은데 역시 가판대의 10위안짜리 옥귀걸이에 혹한 아내가 우리도 밥 먹고 다시 오자고 청한다. 그래서 박물관 인근의 식당을 찾으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긍덕기(肯德基: KFC).

시닝 박물관 앞의 케이에프씨
시닝 박물관 앞의 케이에프씨 ⓒ 오창학
KFC엔 평생 처음 와 본다. 패스트푸드를 처음 먹는다는 게 아니라 묘한 고정관념으로 기피하다가 처음 오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젠 나도 변할 때가 됐다. 국산품 애용 세뇌 세대의 시대정신과 남산골 샌님 근성으로 점철한 내 인생의 흔적을 벗을 때도 됐다. 얼마나 우스운 시대착오적 발상이냐. 외국계 할인매장을 가고 콜라를 마시면서 특정 음식 업체는 안 된다?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지분을 외국이 틀어쥐고 굴지의 한국 자동차가 외국계로 넘어간 마당에 국산과 외제의 구분에 연연해하는 내 모습이.

북적거리는 중국의 이 업소를 보면서 꼭 내 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입으로는 반미를 외치고 자신의 국가가 미국의 유일한 견제국임을 외치지만 중국의 미국계 패스트 푸드점은 차고 넘친다. KFC가 아니라 긍덕기(肯德基)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일까?

또 하나의 단상. 이제 중국은 가난하고 어려웠던 옛 모습을 벗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물가보다도 더 비싸게 팔리는 패스트푸드점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막 변방의 어떤 가족은 1년 내 농사를 지어 600위안을 벌었는데 내 자리 옆의 가족은 가족 점심 한 끼에 200위안을 쓰다니…. 참 이상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가 어디 여기뿐이랴.

교수님이 서적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박물관 앞 점심( 실은 장신구에 대한 아내의 집념이 만들어 낸 일정이었지만)이 무색하게 다시 찾은 가판대엔 여전히 판매원이 없다. 아직 식사시간이 끝나지 않았단다. 그럼 대체 이놈의 점심은 언제 끝나냐고 물으니 그걸 알 수가 없단다. 결국 모든 걸 포기. 갈 길을 재촉한다.

티벳 5000여개의 사찰 중 3600여개가 황교에 속해

타얼쓰 주차장(테라칸 옆에 차를 두니 흡사 한국의 주차장 같다)과 사원 전경
타얼쓰 주차장(테라칸 옆에 차를 두니 흡사 한국의 주차장 같다)과 사원 전경 ⓒ 오창학
시닝 시 외곽으로 20여km를 달린 뒤 타얼쓰(塔尔寺)에 닿았다. 차를 두고 내리는데 테라칸 두 대가 나란히 서 있다. 중국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한국산 차들이건만 이럴 때마다 가슴 뿌듯하다. 백구와 나란히 있으니 흡사 한국의 주차장 같은 느낌이다.

주차장에서 언덕을 넘어 타얼쓰로 내려가는 구조인데 언덕 위에 서면 사원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티벳 5대 불교 중 최대의 신도와 교세를 자랑하는 종파가 게룩파, 일명 황교(黃敎)로 티벳 5000여 개의 사찰 중 3600여 개가 이에 속한다. 바로 이 타얼쓰는 황교의 창시자인 종카바(宗喀巴:1357~1419)의 출생지라서 라마교의 성지로 인식이 되는 곳이고 황교 6대 사원 중 하나다. 종카바가 53세 때 라마교를 창립한 후 제자 근돈주파(根敦朱巴)와 극주절후(克朱節後)가 각각 제 1대 달라이 라마와 1대 판첸라마가 되었으니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알겠다.

안내원과 함께
안내원과 함께 ⓒ 오창학
티벳어로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쪼마춰'를 안내원으로 선택했다. 사원 곳곳을 조목조목 상세히 설명한다. 수명연장을 비는 기수전(祈壽殿)은 좌로 입장해 우로 퇴장하는데 어느 곳이고 문지방은 밟지 않아야 한다. 기수전엔 112그루의 보리수나무가 있어 7월 꽃 필 무렵엔 향기가 일품이란다. 좌측 담엔 장수와 건강을 비는 사슴과 학이 새겨져 있고 우측 담엔 엔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포도와 재운이 트인다는 쥐가 새겨져 있다. 어디나 기복과 기원으로 점철되어 있다.

타얼쓰에서 놀란 것. 불전에 돈을 바치도록 하는 구조는 세심하고도 치밀하다. 불상 앞에 함을 구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물로 비석에 돈을 붙일 수 있게 하였는데 비석에 돈이 가득 찰 때마다 재빠르게 수거함으로써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는 배려가 돋보인다. 물론 100위안 이나 50위안짜리 큰 돈은 남겨두어 타의 귀감이 되도록 유도하는 사려 깊음과 그 돈들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시선을 떼지 않는 보안의식이 철저함은 말할 것도 없다.

대법당
대법당 ⓒ 오창학
과거에 많을 땐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며 공부하였으나 현재는 600여 명 정도만 있다 하며 의학, 무용, 음악 등 모든 걸 배워야 하기에 대개 13~15년을 수행한다 한다.

천연 목장이었던 곳에서 방목 중 종카바가 출생하였고 그의 출생 후 보리수나무가 자라났는데 한 자 쯤 자라자 잎이 10만개였더라지. 불교와 인연이 있는 이라면 잎에서 부처가 보인다는데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리하여 종카바는 16세에 라싸로 가게 된다. 22세쯤 어머니가 종카바를 보고 싶어 하자 바빠서 갈 수는 없으니(불효자였나?) 보고 싶으면 탑을 세우고 나인양 여기소서 하였다는데 그 탑이 기원이 되어 축조된 사원이 바로 여기 타얼쓰(塔尔寺)다.

지금은 원래 탑 위에 11m짜리 탑을 세우고 1.5톤의 은을 녹여 입히고 3500개의 진주를 박아 넣었다. 35kg의 금을 녹여 만들었다는 소금와전의 지붕과 함께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 마음이 답답하다. 금과 은으로 도배한 세속의 냄새.

절의 이모저모
절의 이모저모 ⓒ 오창학
오색천이 매달린 기둥은 티벳 경전이 적힌 각종 리본으로 둘러져 있다. 바람으로 경전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 쪼마춰가 경륜을 돌려보라 한다. 안에 경전 한 부를 넣고 밖엔 '옴마니 반메홈'이 적혀 있다. '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티벳어로 평생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의미다. 오른 손으로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행복이 온다고 말하는데 그 말 때문에 안 돌렸다. 내 행복 빌자고 무슨 행위를 하는 게 꼭 무슨 거래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아내는 열심히 돌린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긴 뭐든 할 수 있단다. 역시 한 경지 위의 사람이다. 난 왜 초월하며 살지 못할까.

타얼쓰의 3가지 예술품은 자연염료로 그린 벽화와 짐승 기름으로 조상한 수유화, 입체감 있게 수놓은 천이라 한다. 조목조목 잘 구경하는데 어째 경내에 낯선 냄새가 가득하다. 바로 수유등 타는 냄새다. 신도들은 짐승의 젖으로 만든 기름 '수유(獸油)'를 헌납하고 불등(佛燈)을 켜서 마음 속 불결한 생각을 떨친다. 야크나 양의 젖 스무 근에서 한 근의 기름이 나오며 연기와 그을음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는데 어째 내 비위에는 잘 맞지 않는다.

승려에 울고 신도에 웃다

타얼쓰 승려와 노파
타얼쓰 승려와 노파 ⓒ 오창학
각각의 불사 입구에서 입장권을 확인하는 승려들의 자세는 심드렁하고 무성의하다. 불전함을 지키는 눈빛도 탐욕스럽기만 해 도무지 불제자로서의 고결한 면모는 찾을 길 없다. 중국 내 사원에서 한결같이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 타얼쓰에서의 실망은 매우 크다.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왔던 티벳 불교에 대한 환상이 컸기 때문인가?

선배가 후배에게 경전의 내용을 질문하고 그 대답으로써 수행의 수준을 가늠하는 변경(辯經)의 장면을 목도할 기회를 얻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의 중앙에선 묻고 답하고 진지한데 양 끝에 앉는 승려들은 치고 박고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돌을 던져 동료를 맞추고 관광객을 보고는 시시덕거린다. 아, 빠져나가고 싶다.

10대 판첸라마(1938~1989)의 육신탑에서 계속 머리가 자란다느니 종카바 당시의 보리수가 살아 뻗어 여기 보리수나무가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그냥 들어줄 수 있을 터인데 이 광경 앞에선 다 덧없다. 뭐를 어찌하면 오래 산다느니, 뭐를 어찌 바치면 복이 온다느니 하는 말과 더불어 혹세무민의 주술로만 다가온다.

그러다 내 눈을 사로잡는 광경에 마음이 풀린다. 수미산 위에 오곡을 부으면 자신이 속한 나라에 평화가 온다는 단 앞에서 가만히 곡식을 얹는 노파의 정성 어린 손길. 이마와 입과 가슴에 두 손을 모으는 그 정성스런 자태에 마음을 바꿨다. 그래 이것이다. 사람의 손에서 나 사람의 손으로 유지하는 속임수라 해도 좋다. 종교라는 것이. 저 노파가 저렇게 신심으로 평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한 것 아닌가. 사람이 이로써 행복해지면 그만 아닌가. 그것을 위해 고개 숙이는 대상이 돌이면 어떻고 나무면 또 어떤가.

땡중은 땡중이고 신앙은 신앙이다. 타얼쓰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리는데 노파로 인해, 그리고 온 몸을 내던지는 뜨거운 신심의 신도들로 인해 마음은 편하다.

혀에 남을 란저우

시닝에서 란저우 가는 고원길
시닝에서 란저우 가는 고원길 ⓒ 오창학
오후에 타얼쓰를 떠나 란저우로 향했다. 시닝 시가지를 경유할 필요 없이 곧장 고속도로에 오를 수 있었다. 시닝에서 란저우 가는 길은 고원지대를 관통해 매끈하게 이어진다. 많은 구간이 고가도로처럼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해 이어진 탓에 회전할 때나 바람이 불 땐 아찔한 부분도 있지만 운전하기에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건설비용 탓인지 유독 이 구간의 통행료가 비싸다.

란저우 뉘러미옌(牛肉面)과 황하 철교 야경
란저우 뉘러미옌(牛肉面)과 황하 철교 야경 ⓒ 오창학
3시간 만에 란저우에 도착했다. 다시 돌아온 길. 낯익은 것들에서 느끼는 안도. 여장을 풀자마자 란저우 라미옌(拉麵)부터 찾는다. '뉘러미옌(牛肉面)' 즉, 쇠고기면이라고도 하는 이 녀석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던 탓이다. 여정 초반에 이곳에 들렀을 땐 너무 늦게 도착해 식당 선택의 폭이 좁아 2% 부족한 면 맛을 느껴야 했는데 오늘에야 제대로 된 식당을 골랐다. 그냥 면이 아니라 '정식'을 시켰더니 달걀에, 고기에, 오이반찬까지 딸려 나온다. 입맛 제대로다.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에 설익은 듯한 면발까지 다 제 맛이다. 때로 지역에 대한 인상은 눈이나 뇌가 아니라 혀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란저우가 그럴 것 같다. 란저우 라미옌이여 영원하라.

밤늦도록 황하철교며 란저우 야경을 노닐었다. 이제 남은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수 일 내로 네이멍구(내몽고) 지역을 관통해 톈진으로 들어가리라. 벌써 지나온 날들이 그리워진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밤에 보는 황하는 사람을 공연스레 감상에 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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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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