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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곪았던 또 하나의 문제가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기상 시간에 맞추지 못한 나와 아내 때문에 교수님께서 노하셨다. 죄송하다는 사죄는 되레 역정만 돋는다.

"이런 식이라면 그만 둬! 오늘은 나 혼자 다니겠네!"

만류하는 내 손을 뿌리치고 교수님은 택시에 오르신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고 싶은 심정. 비록 세 사람, 철봉씨까지 네 사람의 약속이지만 어찌하였든 조직의 율을 밥 먹듯 어겼다. 돌에 맞아도 싸다.

▲ 란저우 정비소. 휠얼라이언먼트를 위해 찾았지만 미리 알고 있는 설정값이 없어서 그냥 하체점검하고 에어크리너 먼지만 털었다.
ⓒ 오창학
란저우 정비소

혹여 교수님이 돌아오실까 싶어 아내를 숙소에 남기고 나와 철봉씨만 백구를 정비하기 위해 나선다. 미리 파악해둔 정비소까지는 금세 닿는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오일 필터와 에어크리너를 갈아주지 못한 게 석연찮다. 엔진오일은 합성오일을 넣었기에 무교환주행 속에서도 큰 부담은 없었는데 1만2000㎞ 가까운 거리를 쉼 없이 달려온 지금쯤엔 한번쯤 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여분의 오일은 없고 남은 거리는 고작 2000㎞뿐인 것을. 광오일로라도 갈까 하다가 생각을 접는다.

휠얼라이언트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 공업사였지만 무쏘 스포츠에 대한 설정값을 알아야 하는데 미리 준비를 못했다. 한국에 전화를 해서 알아볼까 그만뒀다. 여정의 끝에 섰다는 것이 모든 걸 미루게 한다. 그냥 돌아가서 하지 뭐.

그러고 보니 정말 여정의 막바지다. 오늘 란저우를 떠나 인촨(銀川)에 닿으면 한 이틀 머물고 바로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가서 베이징 톈진에 닿을 것이다. 겨우 며칠의 시간이 남았다. 내일쯤 2호차와 합류하게 되겠지. 하미에서 출발한 2호차는 흑장군 전설로 유명한 카라호토(黑水城)가 있는 에치나치를 경유해 몽골과의 국경 지대를 따라 사막을 넘고 있는 중이니까 빨리 도착한다면 내일 밤이나 모레쯤 은촨에 도착할 수 있을 게다.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출국을 마치려면 반드시 합류해야 한다.

정비소에 온 걸음이니 하체 점검하고 에어크리너도 털어냈다. 그 험하고 긴 구간을 달렸음을 감안하면 백구의 상태는 양호하다.

란저우 도수평의 청진사

▲ 도수평 청진사 가는 길
ⓒ 오창학
정비소를 나서 마밍심(馬明心)의 묘를 찾아나선다. 마밍심(마호메트 아민)은 18세기 회족 이슬람 지도자로 회족 봉기 중 순교한 성자이다. 1719년 중국 임하(臨夏) 지역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마저 잃고 어린 나이에 청진사를 오가며 아랍어를 익히고 9세에 숙부와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예멘의 자비드(Zabid) 교단에서 교리를 공부하게 된다.

7대 장로인 압둘 할리크의 뒤를 이은 후 1744년 중국에 돌아온 그는 기존 교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신도들의 신망을 얻고 일명 자흐리 교단을 세운다. 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반대파인 기존 교단과의 충돌이 심해지고 급기야 화사(花寺) 교단에서 란저우 총독을 회유해 청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교파간 분쟁이 청에 대한 반란으로 비화되기에 이른다.

하주를 점령당해 다급해진 청 정부는 마밍심을 란저우로 잡아들였고 이에 마밍심을 구출하기 위한 추종세력이 란저우 성을 포위하게 된다. 청군은 마밍심을 이용해 시간을 번 후 그를 처형하고 도착한 지원군과 함께 회족 반군을 토벌된다. 그러나 이것은 항쟁의 끝이 아니었으며 이후 100여년 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족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을 뿐이다. 마밍심은 반란의 주동세력이 아니었지만 회족들의 가슴에 깊게 자리 잡은 성자가 되었다. 지금 그의 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 자료조사가 부족해 김호동 교수의 저서 <황하에서 천산까지>에 언급된 '도수평(桃樹坪)'이란 지명과 그곳의 이슬람 사원 칭전쓰(清真寺)에 대한 단서만 가지고 찾아야 했다. 물어물어 란저우 외곽의 달동네에 닿았다. 물을 길어서 쓰는, 일부 구간은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후미진 골목으로 연결된 허름한 동네다. 이 달동네의 의미는 뭘까? 회족들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일까?

▲ 도수평 청진사 입구. 바로 이곳에서 1983년 전국 각지의 아홍과 회족의 이슬람 신자들이 모였다.
ⓒ 오창학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움직여 칭전쓰에 도착. 더 이상 차량의 진입이 안 되는 곳이어서 앞 쪽에 주차를 해놓고 철봉씨와 단둘이 걸어 들어간다. 대문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사방이 보이는 전망이다. 바로 이곳이 1983년 전국 각지의 아홍과 회족의 이슬람 신자들이 모였었다는 장소인가?

<황하에서 천산까지>에서 인용한 중국 작가 장승지(張承志)의 글에 의하면 흰 모자를 쓴 수백명의 노인들이 란저우의 도수평에 모여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올리며 시위를 했다 한다. 도시개발로 파헤쳐지게 된 마명심의 묘지를 돌려달라는 것, 이 요구가 관철되기 전까진 죽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정부가 협상 대표를 보내 이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장승지는 이 사건에 대해 "중국에서 모든 종교의 부흥을 알리는 시작"이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마밍심의 묘지를 굳이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회족들의 고난사를 접하며 느끼는 연민과 경외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륜궁과 천안문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자비하고도 단호한 대처를 기억하는 내게 종교인들의 시위에 굴복한 이 조처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보였기 때문이다. 진시황릉 발굴 당시 마을 사람들과 당국의 유물 쟁탈전 이후 눈길을 끄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청진사 예배당
ⓒ 오창학
칭전쓰 내부에 들어가니 무언가를 수선하던 사람들이 보내는 낯선 시선. 마밍심의 묘를 찾아 여기에 왔으며 한국인이라 소개를 하니 무척 반갑게 안내한다. 캠코더를 찍어도 되겠냐는 문의에 흔쾌한 허락. 회족의 이슬람 사원은 중국 건축의 형태를 띄며 이름 또한 '寺'를 붙여 청진사라 부른다. 이곳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사원이며 30~40명 가량의 신도가 기도하는 곳이라 한다. 회족이 많은 동네라고는 해도 한족 주민의 반이 채 되질 않는다.

▲ 청진사 관리건물과 이곳에서 일하는 18세 청년 마하시.
ⓒ 오창학
18세의 회족 청년 마하시가 따라붙어 차를 대접하고 우릴 안내했다. 회족 중 열에 아홉은 마(馬)씨다. 원나라 때까지만 해도 원래의 이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대엔 거의 한족화된 이름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마호메트'에서 따온 '마'씨 성이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어디 이름뿐이랴. 7세기경부터 중국에 들어간 아라비아인이 오랫동안 한족(漢族)과 혼혈되고 한어를 사용함으로써 인종 간 구별이 거의 없어졌다. 이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흰 모자와 엄격한 이슬람 종교가 회족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점이 불가사의다. 어떻게 이들은 언어와 인종적 특징 없이 중국 정부의 종교탄압기를 이기며 자기 정체성을 지켜왔을까. 청 대의 회족 강제 이주로, 또는 생활상의 이유로 중국 전역에 흩어진 회족들은 겨우 900만이란 숫자로 한족의 섬에서 자기를 지켜나가고 있을까. 이 모든 것의 중심엔 그들의 종교가 있었을 것이다.

마하시는 내 질문에 소상한 답변을 해 주다가 마명심의 묘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인데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며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아까 입던 옷도 말끔한 옷인데 성자의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당사자의 마음 자세는 그게 아닌가 보다.

▲ 란저우 대학 인근의 똥촨따꽁베이(東川大拱北). 여기에 마밍심의 묘가 있다.
ⓒ 오창학
마하시가 안내한 곳은 다시 복잡한 란저우 시내의 어느 복판이었다. 그러니까 란저우 시내에서 외곽인 도수평을 찾아 차로 20분 넘게 애써 이동했는데 그 길을 그대로 다시 되짚은 셈이다. 그래도 아깝진 않다. 내 발걸음은 의미있는 흔적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꼭 누구의 묘비를 구경하려 하는 건 아니니까. 도수평의 작은 청진사와 그 언덕마을을 보며 의미있는 사건에 잠기지 못했다면 도심 속 묘비 하나를 눈에 담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밍심의 묘를 찾다

란저우 대학 인근의 똥촨따꽁베이(東川大拱北)에서 멈췄다. '꽁베이(拱北)'란 칭전쓰는 아니면서 성현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이슬람 사원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마밍심의 묘는 도수평으로 쫓겨 갔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는 셈이었다.

▲ 마명심의 묘.
ⓒ 오창학
공원 같기도 하고 고즈넉한 절집 마당 같기도 한 공베이의 뜰을 지나 후원 건물인 듯한 곳에 이르니 따로 전각을 마련해 놓고 마밍심의 묘비를 세워놨다. 아랍어를 새긴 묘비가 산뜻하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조심스레 훑어보았다. 마하시의 표정이 사뭇 경건하다. 먼 곳에서 온 이방인조차 순교한 성자의 무덤에서 회족의 고난과 애환을 읽을진데 그의 마음은 오죽하였으랴.

마하시가 공베이의 아홍을 소개시켜 줬다. 아홍은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다. 기독교의 목사나 천주교의 신부와 같은 개념이냐는 물음에 '의식 주관자'이며 이란에선 '학자'의 의미이며 당 대에 처음 왔을 땐 이세민이 '현자, 지자, 덕인'의 의미로 불렀다는데 정확한 개념 이해는 되지 않는다.

우리 말고도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마밍심과 회족의 신앙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직 50대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아홍은 인상도 좋고 우호적인데 회족의 신앙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눈매가 살아 움직인다.

짧은 시간에 내게 회족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이슬람 신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조금 분위기를 풀다가 가장 궁금했던 1983년 도수평 사건에 대해 물었다. 예민한 부분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마음과 함께.

▲ 83년의 도수평 사건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아홍
ⓒ 오창학
"여긴 이슬람 4개 교파 중 '광명정대(자히르)'파의 창시자 마밍심이 묻힌 곳으로 해방 후 70무 정도의 규모로 꽤 컸죠. 1958년 종교 억제 이후 주변 토지가 병원, 파출소, 유치원 등 정부기관으로 이용되는 등 수난을 당했습니다. 불만이 있었지만 말을 못하고 지내다가 80년대 이후 종교 회복 정책으로 간쑤성 정부와 원래 땅의 회복을 협의하고 유품들은 일단 도수평 칭전쓰로 옮겨 놓고 참배했습니다."

잠깐 생각 후 입을 연 아홍은 단호하고 거침 없는 태도로 열변을 토했는데 어휘 선택과 내용 전개엔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어쩌면 통역을 해 준 철봉씨의 선택과 태도가 신중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83년도 전국 각지의 아홍과 신자가 도수평에 모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밀결사로 신고가 들어가서 란저우 군구의 3개 대대가 도수평을 포위했지요. 순수한 종교 집회란 걸 알게 되었던지 군대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모인 신자들도 포위 사실조차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신자 대표를 영하회족 자치구 성정부에 있는 마명심의 6대 손자 마연송에게 보내어 어떻게 종교모임을 반혁명단체로 규정할 수 있는가 강력히 항의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 후 중교 종교협의 부회장 왕 아무개가 파견되고 감숙성 정부와 협상하여 여기 공베이를 84년에 짓고 85년에 마명심의 묘를 이장해 온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순화된 표현이며, 어디까지가 아홍의 개인적 견해인지 감이 잘 오지 않지만 83년의 일이 중국 작가의 묘사만큼이나 장엄하지는 않았을 거란 의심은 인다. 목숨을 내건 신념 고수의 투쟁이었다기 보단 특정 사건에 대한 단체적 항의 성격이 강하지 않았나 싶다. 그 때의 시위는.

중국 정부도 관용은 있다.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농민시위가 그 실례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 즉 공산당을 넘어서는 위험에는 단호한 제재를 가한다. 당원보다도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정치이념을 넘어설 종교이념을 가진 거대 존재 파륜궁이나 당과 국가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민주화 시위는 용납할 수 없었으되 소수 인민이 종교적 열망으로 소원을 비는 데야 굳이 강경한 입장을 취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수평을 그리워할 때의 희열감은 퇴색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사건에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문헌으로 세상을 접하던 꺼풀이 벗겨진 것 같아 마음은 가볍다. 차 대접과 함께 긴 시간 우릴 응대했던 아홍과 마하시가 배웅하는데 그 모습이 참 순수하고 맑다. 마하시는 오랜 만에 나왔으니 공베이에서 사람들을 더 보고 가겠다 한다. 지갑에서 택시비를 꺼내 그에게 건넸더니 펄쩍 뛰며 거절한다. 도수평에서 예까지 우릴 안내해 준 것도 고마운데 그 먼 거리를 자기 돈으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며 나도 같이 펄쩍 뛰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 돈을 넣고는 얼른 나섰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교수님께서 돌아와 계신다. 그저 송구스런 마음으로 머릴 조아리는데 먼저 말씀을 건네신다.

"그래 원하는 건 봤는가?"
"예."
"그럼 됐네."

다행이다. 오전을 보내시면서 교수님의 심기가 많이 누그러지신 것 같다. 타지까지 나와서 불초한 제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시다.

한국인 구경

아침의 불편함은 어디 갔냐 싶게 다시 의기투합. 오후 한시에 란저우의 숙소를 나서 인촨으로의 여정에 나섰다. 공평하게 100Km씩 3교대 운전. 다행히 란저우-인촨 사이엔 전 구간 고속도로여서 5~6시간 안에 당도할 것으로 같다. 시닝과 베이징을 잇는 거대한 고속도로의 한 중간을 끊어 달리는 일정이다.

▲ 란저우에서 인촨 가는 길. 광막한 모래 땅 사이로 뻗은 고속도로의 연속이다.
ⓒ 오창학
오후 2시. 란저우 83Km지점의 바이인(白銀)휴게소에서 점심을 했다. 복무원(종업원을 이렇게 부른다) 수보다 손님의 숫자가 적은 곳이다. 흰 밥과 서너 가지 요리를 놓고 먹는데 나이 어린 여복무원들은 한국인 구경에 난리가 났다. 우리들의 대화를 대놓고 엿듣다가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고 시끄럽게 군다.

말을 붙여보니 한국의 배우 안재욱이 자신들의 우상이라는데 드라마에선 항상 중국어가 더빙되어 나오는 탓에 한국어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단다. 해서 관심을 가진 것인데 자기들 딴엔 한국어 음성이 매우 신기하게 들린다나. 하긴 갓 고등학생이나 될까한 나이의 소녀들이 간쑤성의 외진 도시 바이인(白銀)에서 한국인을 만날 일이 언제 있었겠나. 복무원들은 우리 옆 탁자에 앉아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기꺼운 마음으로 구경거리가 돼 주었다.

부른 배를 들춰서 다시 차에 오른다. 연료가 반 가량 남아 있었으나 매사 불여튼튼. 아예 이 휴게소에서 기름을 넣고 떠나려는데 정전이라 안 된단다. 석연치 않았지만 별 수 있으랴. 설마하는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에서 생긴 일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한 시간이나 움직였을까. 휴게소 표지가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 휴게소는 아직 건축이 완료되지 않은 채 한창 공사 중이다. 그런데 휴게소 표지는 왜 벌써 세워놨담.

다시 고속도로로 나와 달리길 한 시간. 다시 휴게소가 나온다. 역시 공사 중. 슬슬 약이 오른다. 왜 신축 중인 휴게소 안내 표지를 수십 Km 전부터 성실히 세워놓느냔 말이다.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한 60Km만 더 가면 휴게소가 있단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미 연료계의 경고등은 들어왔다. 현창(백구의 짐칸 위 선반)의 비상 연료통엔 약간의 연료가 남아있는데 마저 넣을까 하다가 그냥 간다. 저걸 언제 내려서 넣겠나. 어차피 다음 휴게소엔 주유소가 있다는데.

운전을 하는 아내는 연료 경고등이 못내 부담스럽나 보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 100Km 정속 주행을 한다. 경험상으로 백구의 경고등 들어오는 시점이 15L가량 남았을 때이며 100Km가량 주행할 수 있음을 알기에 내심 느긋했지만 아내에겐 잔뜩 겁을 준다.

"가다가 기름이 떨어질지 몰라. 그러면 엔진이 멈추고 차가 서거든. 운전대가 무거워지고 브레이크는 딱딱해질 거야. 그땐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깜빡이를 켠 채 갓길에 붙여."

하하. 아내가 긴장했다. 차를 2차선으로 붙인다. 하긴 1차선으로 가다가 차가 멈춰버리면 피할 방법이 없으니까. 백구는 아내의 차다. 등록도 그렇게 되어 있거니와 실제 출퇴근용으로도 아내가 탄다. 그래서 자기가 나보다 백구 주차를 더 잘 한다고 우긴다. 나도 그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 주는 편이다. 그런데 아내는 백구를 모른다.

탈 없이 다음 휴게소에 도착했지만 허망하게도 이 휴게소 역시 개장을 안한 상태. 드디어 고속도로에서 연료가 떨어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는 순간이다. 란저우를 떠난지 320Km 동안 한 번도 주유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다행히 싣고 다니던 연료통에 약간의 기름이 남았기에 망정이지 낭패를 볼 뻔했다. 한국 같으면 긴급서비스를 부르겠지만 이곳에선?

비상연료통을 챙겨 지나가는 차를 세운다, 한 60여Km 가다가 인근 읍으로 나가 연료통을 채운다, 다시 고속도로까지 와서 반대로 진행하는 차량을 잡는다(물론 세워줄 때 얘기다), 휴게소의 반대편에 내려 연료통을 든 채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이러기까지 시간은 3시간쯤 흘러간다, 날이 어두워진 후 야간 주행하여 밤 늦게 목적지에 들어간다.

단순히 연료가 떨어져 겪어야 하는 일 치고는 얼마나 어이없는 시나리오냐. 그러나 다행히 약간의 연료가 있다. 지난 날 아얼진-거얼무 구간에서 쓰고 남은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구간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그러나 고작 10L. 겨우 다음 주유소를 찾을 수 있는 분량이다.

결국 다음 휴게소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인근의 마을 주유소를 찾았다. 참 황당한 날이다. 오늘의 교훈, 고속도로에선 비상연료를 준비하자. 그렇지만 이 교훈도 내년이면 소용이 없겠다. 그 많은 휴게소들이 개장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이었으니 내년이면 60~80Km마다 주유지점이 생길 터이다.

회족들의 정신적인 고향, 인촨

▲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성도 인촨(銀川)에서의 저녁.
ⓒ 오창학
오후 7시. 닝샤 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성도 인촨(銀川)에 도착하다. 연료 문제로 숨을 죽이기는 했지만 비교적 순탄하고 원활한 여정이었다. 간쑤성과 지형적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도시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 정돈된 자태로 자리잡은 황무지 속 도시. 흡사 중국 본토에서 만나는 홍콩, 싱가폴이라고나 할까.

이 낯선 느낌은 뭘까? 왜 이제까지의 다른 도시들과 다른 냄새가 나는 걸까? 건물 양식? 그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마 저 거리의 풍경 때문인 것 같다. 차들이 정지선에 서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너는 낯선 모습. 변방이기에 차와 인구가 적어 한산한 것이 아니가 생각하다가 그럼 시닝은 변방이 아니어서 그리 혼잡했나? 대체로 차들이 새 차인 것 같은데 비교적 최근에 차량의 보급이 이루어지고 교통문화가 정착했다는 이야기인가? 모르겠다. 이곳 인촨의 거리는 내게 또 하나의 궁금증을 안기며 편안하게 나를 받아들였다.

란저우-인촨

ⓒ오창학

란저우에서 인촨 가는 길은 전구간 고속도로. 시닝과 베이징을 잇는 고속도로를 타고 움직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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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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