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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습기 많은 곳에 남들이 볼새라 작게 피어있는 괭이눈
숲 속 습기 많은 곳에 남들이 볼새라 작게 피어있는 괭이눈 ⓒ 김민수
꽃들 중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 있고, 싫어하는 못 생긴 꽃들이 있다. 그러나, 못 생긴 꽃이라도 흔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는다. 어차피 사람들이야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지천에 있으면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못 생긴 꽃이라도 기죽지 않고 피어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들꽃에게 배워야 할 삶의 지혜가 아닐까? 아무리 예쁜 꽃이라고 뻐기는 일 없고, 못 생긴 꽃이라고 기죽지 않는 들꽃들,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그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모습 그대로 피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들꽃들의 삶이야말로 자연스럽고 진지하다.

서너송이 함께 피어있어도 작기만 하다.
서너송이 함께 피어있어도 작기만 하다. ⓒ 김민수
이른 아침 나는 숲 속의 품에 안겼다. 아침이슬을 담기 위해서였지만 뜻밖의 꽃을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안고 이슬이 촉촉한 숲을 걷는다. 여기저기 푸른 싹들이 숲의 가장 낮은 자리를 물들여가고, 그 사이 연한 노랑의 빛을 간직한 산괭이눈이 눈을 반짝이며 숲은 지키고 있다.

한 송이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어 옹기종기 몇 송이가 모여 피어났는데도 "저것도 꽃이야?" 할 정도다. 그런데 꽃 같지도 않은 꽃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이른 봄이면 지천에 피어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꽃색깔이 화사하지 않아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꽃색깔이 화사하지 않아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 김민수
그런데 그것이 참 신기하다. 화사하지 않아서 아주 오래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작은 것들이 삐죽삐죽 올라와 봄이 시작된 숲의 낮은 곳에서는 제법 높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야 고작 3-4cm에 불과하지만 그들을 담기 위해 숲에 누우면 어둠을 밝힌 작은 촛불들 같아 숙연해진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우리 역사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는 촛불이 밝혀졌다. 촛불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 큰 물결을 이루고, 그 작은 빛들이 모이고 모여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곤 했다. 이제 또 다시 이 촛불들이 밝혀져야 하는 시기는 아닌지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려고 이러는 것인가?

그래도 다른 꽃에 비하면 못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다른 꽃에 비하면 못 생긴 것은 사실이다. ⓒ 김민수
오로지 잘 생긴 것들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못 생긴 것들은 물론이요, 평범한 것들까지도 잘 생긴 것들의 들러리가 된다. 너도나도 그 잘 생긴 것들 틈에 낄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을 갖고 뛰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자신이 넘지 못할 벽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학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학원교습을 단속하겠다 했더니 학부모들이 먼저 들고 일어서는 현실, 과연 우리는 한창 뛰어놀며 꿈을 키워가야 할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로지 시험, 거기에서 뒤처지면 마치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라고 맹신하고 있으니,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횡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못 생긴 것들도 땀 흘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풍족하진 않아도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괭이눈보다 애기괭이눈은 더 작다.
산괭이눈보다 애기괭이눈은 더 작다. ⓒ 김민수
자기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이 꺾이지 않는 세상, 그런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겐 유토피아인 듯하다. 산괭이눈을 만난 후 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산괭이눈의 천적인 애기괭이눈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그들은 산괭이눈보다도 더 못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의 기준은 당신의 기준이고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이 가장 좋아요. 이 모습으로 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 그것이 지금 내 모습이지요. 당신들이 이맘때 이 곳에서 나를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당신이 못 생겼다고 하는 지금 이 모습으로 인한 것이랍니다."

산괭이눈보다 꽃의 색깔도 덜 예쁘다.
산괭이눈보다 꽃의 색깔도 덜 예쁘다. ⓒ 김민수
산괭이눈과 애기괭이눈을 만나고 숲에서 나와 산길을 따라 걷는다. 봄 햇살이 따사롭다. 길의 끝은 어디일까?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는 길,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지막 동네는 어디일까? 거기에서 또 다시 시작되는 길이 있을 터이니 길의 끝은 없는 것은 아닌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갈래 길을 만나고, 여러 갈래 길 중에서 선택한 길을 걷는다. 그리고 걷고 또 걷다 보면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그 길이 인생길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만난 것이니 남을 원망할 일도 아닐 것이다.

애기괭이눈의 자유분방한 가지들이 마치 길을 보는 듯하다. 길, 눈에 보이는 길이 있고,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식물에 비교하자면 드러난 가지는 보이는 길이고, 뿌리는 보이지 않는 길이다. 이 두 길이 소통함으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소꿉놀이하는 꼬마들 같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소꿉놀이하는 꼬마들 같다. ⓒ 김민수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왜 이렇게 못 났지?" 한탄을 하게 된다. 그동안 살아온 삶, 가치관들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에, 그 전에도 이기적인 속물로 살아왔으면서도 더 이기적인 속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점점 속이 좁아지는 것이다. 세상과 점점 단절되고 이웃과도 담을 높게 쌓아가며 살아간다.

그러다가도 자연의 품에 안겨서 한탄하지 않고 그냥 자기대로 살아가는 못 생긴 꽃들을 보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돌아보고, 평정을 되찾는다. 그래서 자연은 나에게 묘약이다.

아마도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왔다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니면 세상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실패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후자가 더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나마 한 가지 느릿느릿 걸어가며 작은 들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얻었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이 봄날이 가기 전에 만나지 못한 꽃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숲으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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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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