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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채택 여부가 국제적 쟁점이 되어 있다. 미국 내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미국이 동북아에서 추진하는 자국의 위상변화의 한 면모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냉전시기에 미국은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눈감아 주는 태도를 취했다. 독일은 과거 범죄를 사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만큼은 유독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본을 비호하는 미국의 태도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하위에 두고 동북아 전략을 수행하는 상황 속에서 일정 정도는 일본을 비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과거 범죄와 관련한 한·일 마찰은 자칫 미국 주도의 미-한-일-대만 연대에 차질을 초래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일·대만이 미국의 핵우산에 안보를 맡기고 있는 상황 하에서 역내 국가들의 마찰은 자연히 잠복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대만 두 정부는 일본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탈냉전이 점차 대세를 이루어가면서, 일본의 과거 범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야스쿠니 문제에 관한 미국 내의 분위기나 미 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문제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의 과거사에 관한 미국의 태도는 점차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은 다분히 심판관 같은 인상을 풍기면서 일본의 죄상을 나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는 야스쿠니문제나 위안부문제 등에 대해서만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미국은 앞으로 여타 쟁점들에 대해서까지 목소리를 보다 더 높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대략 세 가지의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탈냉전 이후 동북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일시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한 동북아 국가들은 한국·일본·대만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탈냉전이 계속되면서 중국까지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북한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되면, 북한도 일정 정도는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북한이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하는 것과 한국이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일이겠지만,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이후의 일정 기간 동안에 경제적 필요 등에 기인하여 미국의 리더십을 제한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식당 주인'은 새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옛 손님'들처럼 다룰 수는 없다. 옛 손님들은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있지만, 새로운 손님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고, 북한도 이미 독자적으로 핵실험을 끝낸 상태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서는 북한·중국을 자국의 리더십 안으로 끌어들이자면, 양국의 비위를 맞추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 자국의 리더십을 확대하거나 혹은 새롭게 관계를 개설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일본의 과거범죄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북한·중국이 싫어하는 것을 자신들도 싫어한다는 점을 미국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대만에 대한 미국의 리더십이 질적 변화의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북아 위성국 가운데에서 한국과 대만은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나라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나라들은 그 점과 관련하여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명확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대만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여 각각 북한·중국과 대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냉전 시기의 미국은 한국·대만에 대해 도덕적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두 나라를 얼마든지 리드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일본의 과거 범죄를 눈감는 부도덕한 자세를 취한다 해도, 한국·대만은 미국의 리더십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핵우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탈냉전이 확산되고 남북교류와 양안교류(중국-대만 교류)가 점차 넓어짐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이 없더라도 한국·대만이 충분히 안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한국과 대만은 미국이 계속해서 부도덕을 옹호하면 미국에 대해 "노!"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미국은 과거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오늘날에는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고는 자국의 리더십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미국의 핵우산이 점차 기능을 상실하는데다가 한국·대만이 일정 정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이 한국·대만에 대해 도덕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두 나라를 리드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양국 국민들이 비판하고 있는 일본을 미국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미국이 이제는 일본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일본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정상급에 속하는 나라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미국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실력과 모순되는 양상이다.

그리고 미국의 국력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의 국력은 상대적으로 향상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카드'는 동북아는 물론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써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대일 압박 혹은 견제에 유용한 카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미국은 일본을 옹호함으로써 일본을 자국의 하위에 두었지만, 향후의 미국은 일본을 어느 정도 견제함으로써 일본을 자국의 하위에 두려 할 것이다.

대략 이상의 세 가지 이유에 기인하여, 미국이 예전과 달리 위안부 문제나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은 당장의 전략적 필요성 때문에 일본을 견제하고 있지만,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의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미-일 협력체제를 통해 역내 패권을 행사해온 미국이 뒤늦게 과거 전력(前歷)을 문제 삼아 일본을 곤경에 빠뜨린다면 이는 미·일 간의 신뢰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패권적 기초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악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에는 일본의 범죄를 눈감아온 미국이 최근 들어 두드러지게 일본의 과거범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북한·중국을 적극 포섭함과 동시에 한국·대만에 대한 리더십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며 나아가 강국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에, 최근 미국 내의 흐름은 탈냉전 구도 속에서 동북아 패권을 계속 온존하기 위한 미국의 자구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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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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