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의 상징인 대안탑
서안 관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대안탑이다. 대안탑(大雁塔, 따옌타)은 648년 당나라 고종이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인 자은사(慈恩寺)에 있다.
대안, 큰 기러기란 이름의 유래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얽혀져 있다. 예전에 소승불교의 스님들은 육식을 하였는데, 어느 날 고기가 모두 떨어져 먹을 것이 없었다. 스님들이 부처님께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자, 날아가던 기러기가 죽어서 스님들 앞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은 이후 육식을 하지 않고, 이 깨달음을 항상 간직하기 위해 대안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복을 받는 양도 초의 개수만큼?... 신라 원측스님의 위패 모셔진 사당
자은사 안으로 들어서니 양쪽에 종루와 고루가 있고,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향로에 빨간 향을 피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드리고 있다. 향을 피우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우리는 향을 하나씩 태워 분향하는 데 반해, 중국 사람들은 한 움큼씩 쥐고 태운다.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이다. 서양인 관광객도 많았는데 모두 경쟁이라도 하듯 한 움큼씩 향을 피우고 있다.
대웅전의 뒤로 돌아가면 위패사당이 있다. 많은 위패들 중에 신라에서 건너간 원측스님의 위패를 찾았다. 원측스님은 규기스님과 함께 현장법사의 제자로 6개 국어에 능통하여 경전의 번역작업에 크게 힘쓴 분이다. 그분의 사리는 서안 남쪽 흥교사에 보관되어 있다.
서유기의 내용도 삼장법사는 현장법사를, 손오공은 그의 제자 원측법사를, 저팔계는 규기법사를 모델로 쓴 것이라 한다. 위패 옆 벽면에는 정교하게 새긴 옥으로 만든 부처님이 있다.
대안탑, 현장법사가 불교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탑
대웅전의 뒤로 거대한 대안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의 절은 정문을 들어가면 탑이 나오고 그 다음에 대웅전이 나오지만 자은사는 다르다. 탑에 사리가 없기 때문에 탑이 대웅전 뒤에 나온다고 한다.
대안탑은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법사가 17년간 인도를 다녀오면서 가져온 680여 건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652년 법사는 단문 남쪽에 석불탑을 만들어 서역에서 가져온 경장을 안치하고자 했다. 기공에 임박해서 법사는 친히 삼태기를 들고 벽돌을 운반했다. 이렇게 2년이 걸려 이 탑은 완성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5층의 인도식 불탑이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모습에서는 인도풍 불탑의 양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4각의 7층, 64m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안탑은 1층의 한 변의 길이가 25m이고 층수가 높아질수록 그 폭이 좁아진다.
1층 출입구의 좌우벽에는 태종이 내린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함께 황태자시절의 고종이 기술한 술성기명(述聖記銘)이 각각 새겨 있는데 당대의 명필이자 명재상인 저수량이 쓴 글씨로 더욱 유명하다.
탑 내부로 올라가니 각층의 사면에는 창을 내어 밖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의 절터는 당 시대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당나라 때의 영광은 느낄 수 없지만 탑 남쪽을 막고 서 있는 법당과 좌우 건물, 더 남쪽으로 종루와 고루 등이 늘어선 모습은 옛 모습의 잔영을 보여준다.
탑의 높이에 대해서는 현장법사가 세웠을 당시는 5층이었으나, 측천무후 시절에 여자를 나타내는 짝수로 세우기 위해 10층으로 증축했고, 후에 명대에 이르러 지금의 7층 높이로 변형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소안탑, 대안탑과 대비되는 여성스러운 탑... 지진에 의해 파괴된 탑신
서안에는 대안탑과 더불어 소안탑(小雁塔, 샤오옌타)이 있다. 서로 연관성은 없지만 이곳 천복사에 있는 것이 크기 면에서 약간 작다는 이유로 소안탑으로 불린다. 천복사는 684년 당 고종이 죽은 후 헌복을 하기 위해 지어진 유명한 불교 사원이었다.
원래 이름도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 소안탑 또한 당나라 승려 의정대사가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이곳에서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래는 15층 높이였으나 섬서성 대지진 때 훼손되어 현재는 43.3m의 13층탑이다. 사각형의 평면에 1층의 높이가 가장 길며 점차 올라갈수록 층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폭도 좁아지는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여준다.
1층 북쪽과 남쪽에 문이 있고, 2층부터는 각 층마다 창이 있다. 소안탑은 대안탑과는 달리 어둡고 나무 계단이 좁고 낮기 때문에 올라가기 쉽지 않았다. 대안탑이 거대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의 남성적인 탑이라면 소안탑은 조금씩 무너져버린 모서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전체적으로 은은한 실루엣이 돋보이는 여성적인 탑이다.
부처님의 힘으로 다시 붙었다?
소안탑에는 지진과 기단석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1487년에 발생한 지진 때 소안탑의 기단석이 반으로 갈라졌다. 34년이 흐른 1521년, 또 한 번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다음날 살펴보니 갈라졌던 돌이 다시 붙어 있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이를 부처님이 기적을 일으켜 합쳐 주었다고 '신합'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실 이는 당시 건축물을 지을 때 기단에 사용한 반구형 돌이 외부에서 힘을 받으면 돌 안에서 내부 응력이 생겨나 갈라진 돌이 서로 붙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과학적인 이유에서 소안탑 기단석이 붙는 것을 옛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