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서안은 한결 푸근한 느낌이다. 서안성벽이 우리를 다시 반갑게 맞이한다. 마지막 서안의 일정은 아침 일찍 서안 성벽을 오르고 대안탑과 서안탑, 섬서성 박물관 등 성벽 안 또는 가까운 인근의 유적을 보기로 했다.
높고 두터운 서안 역사의 상징, 서안 성벽
서안 성벽에 올랐다. 서안성은 세계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성곽 중 하나다. 지금의 성벽은 당대 성벽의 기초 위에 명나라 홍무제 때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장안이 가장 번성했던 당대에는 그 명성에 맞게 동서로 9.7km, 남북으로 8.6km로 면적이 대략 서초구의 두 배 정도인 84㎢의 땅에 네모반듯한 성곽을 지었다.
성내에는 100만 명이 거주했고 성 주위에도 10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 성곽의 안은 동서남북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북의 중심지에는 내성과 황성이 있는데, 이것이 전체 면적의 9분의 1에 해당한다.
북쪽의 주작문(원래 주작은 남쪽을 나타내지만 황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문이 남쪽문인 셈이다)에서 남문인 명덕문에 이르는 150m 폭의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나뉘었다. 또 주작대로와 폭이 같은, 좌우 150m의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나 있었다. 이에 따라 전 시가지는 바둑판 같은 110개의 방으로 구획되었다.
각 방은 각기 흙벽으로 둘러싸고, 소형 성문인 동문을 내었는데 해가 떨어지면 문은 닫혔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도 이러한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외성과 내성으로 2중의 성곽을 두르고, 내성의 남문에서 외성의 남문에 이르는 너비 70m의 주작대로라는 큰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구분
동구와 서구에는 동시와 서시라는 시장이 있었는데 각 시마다 200여 개의 점포가 있어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였다고 한다. 오늘날 물건을 뜻하는 '뚱시'라는 말도 동시와 서시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누어진 동시가지와 서시가지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는데 동구에는 황족과 관료, 귀족 등 상류층이 거주했고, 서구에는 상인과 서민과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했다. 특히 실크로드 길을 왕래하던 교역은 주로 서시에서 이루어졌다.
서쪽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갈 수 없었지만, 동쪽에 사는 황실에 관련된 사람들은 하인을 거느리고 서쪽의 시장에 와서 필요한 것들을 사 가지고 갔다.
외국인 자유 보장
또 장안의 거리는 외국인들로 그득했다. 한반도에서는 최치원과 같은 학자, 의상과 같은 승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 같은 정치적 망명객, 흑치상지나 고선지 같은 망국의 장군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장안에서 활동했는데, 장안은 이러한 외국인들에게 자유를 보장하였다.
특히 외국인 출신 공무원을 뽑기 위한 과거인 빈공과(賓貢科)를 두었던 나라가 바로 당나라였다. 외국인 가운데는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는데, 이들을 번장(蕃將)이라 한다. 고선지 장군도, 양귀비를 사모했던 안녹산도 번장 출신이었다. 종교도 조로아스터교, 경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교단들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성벽을 넓게 만든 까닭은
그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남쪽 성벽의 일부인데 둘레가 14km, 높이 12m, 두께는 15m에 달한다. 성곽 위에 올라가니 성곽 윗면의 넓이가 4차선 도로만큼이나 넓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보인다.
길이만 길고 너비는 얼마 되지 않는 만리장성과는 대조적이다. 성곽 위를 이처럼 넓게 만든 것은 만일 대문 중 어느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쪽에서 신속하게 지원병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화살을 실은 마차가 이동하기에도 좋다.
성곽은 바깥은 벽돌을 쌓고, 안은 흙을 다져 쌓았다. 벽돌을 쌓을 때는 석회와 모래, 그리고 찹쌀을 섞어서 반죽한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경주와 자매결연 마라톤 대회를...
성벽에는 동서남북의 4개 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흐르고,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다. '고성제일문(古城第一門)'이라고 씌어 있는 북대문의 건물은 과거 기병을 비롯한 군인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하나 지금은 기념품점으로 쓰이고 있었다.
전동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빌려서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그냥 걷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서안이 우리나라 경주와 자매결연 맺은 1993년, 그 기념으로 성곽 위에서 각 시의 공무원들이 마라톤 대회를 했다. 이후 매년 서안 시민들의 13.7km의 성벽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뜨거운 서안의 성벽을 도저히 혼자서 걸어서 돌 수는 없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전동차를 타기로 했다. 열 명이 정원인데 나를 제외한 다른 손님들은 가족 단위로 온 중국인들이다. 전동차의 운전사가 성벽을 돌며 중국말로 이곳저곳 설명해 주는데 저쪽이 종루, 이쪽이 서안역이란 말을 제외하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말 못하는 서러움이 이러할까
성벽을 반쯤 돌았을 즈음 전동차의 운전사가 표를 내라고 한다. 출발지에서 표를 줬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영어로 말해보고 손짓도 해보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급하니 우리말로도 말하게 된다. 운전사와 둘이 서로 자기네 말로 싸웠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참을 실랑이하고 있으니 나머지 손님들까지 거들었다. 끝내 약간의 영어가 통하는 손님 덕분에 운전사가 손님의 수를 잘못 세어서 생긴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말 못하는 인어공주의 서러움이 이러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