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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말라있던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비로소 봄이 온다.
겨우내 말라있던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비로소 봄이 온다. ⓒ 최성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인 보리소골에도 이제 완연한 봄이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찬 기운이 여전하지만, 한낮에는 제법 따스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몇 해 동안 같은 자리에서 늘 돋아나던 파가 올해도 가장 먼저 몸을 내민다. 그리곤 저 먼저 봄을 맞으려는 듯, 온갖 풀들이 다투어 돋아난다.

집 뒤 골짜기를 따라 아내와 산책하러 가는데, 개울물 소리가 졸졸 들려온다. 지난 가을부터 말라 있던 개울이다. 봄이 오니 그 마른 개울물에도 물이 흐르고 있다.

자연의 섭리란 이토록 오묘한 것이다. 농사철이 되자 땅이 제 안의 물을 길어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 물을 받아 나무들 잎을 틔우고, 풀들 몸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다.

산괴불주머니. 가장 먼저 피어나 이제 봄임을 알려준다.
산괴불주머니. 가장 먼저 피어나 이제 봄임을 알려준다. ⓒ 최성수
아직 마른 풀들이 그들먹한 숲길로 일찍 깨어난 풀잎들이 조금씩 푸른 기운을 피워내고 있다. 산괴불주머니가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켜고 제 꽃을 피워 올린 길, 마른 나뭇가지에도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마른 풀섶을 눈여겨보며 걷던 아내가 나지막하게 외친다.

"여기 이 꽃 좀 봐요."

아내의 말소리는 행여 잠든 꽃의 단잠을 깨울까 걱정스러운 듯, 낮다. 그러나 경이로움이 가득 배어 있다.

둥근털제비꽃. 저 여린 몸짓으로 봄을 불러오고 있다니!
둥근털제비꽃. 저 여린 몸짓으로 봄을 불러오고 있다니! ⓒ 최성수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니,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피어 있다. 그 녀석은 마른 풀과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조차 않는다. 나는 꽃 가까이에 쪼그려 앉아 숨죽인 채 녀석을 바라본다. 은은하고 여린 보랏빛이 청초하기 그지없다. 잠시 내린 빗방울에 제 몸을 적신 채 봄이 왔다고 소곤거리고 있다. 둥근털제비꽃이다.

작고 여린 꽃
마른 풀숲에 숨어 있었네.
눈 크게 뜨고 가만가만 숨죽이면
그 꽃 피어나는 소리 들리네.

봄 오는 소리 들리네.


우리 부부는 한참 동안 작은 그 꽃을 바라보며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꽃 피운 저 작고 여린 꽃의 마음을 서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온몸으로 봄을 열어젖히는 저 제비꽃의 힘겨움이, 그 힘겨움의 아름다움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마음을 꽉 차게 만든다.

둥근털 제비꽃. 빗방울 머금은 은은한 몸짓이 봄의 표정 아닐까?
둥근털 제비꽃. 빗방울 머금은 은은한 몸짓이 봄의 표정 아닐까? ⓒ 최성수
한식 인사 겸 조상님들 산소를 찾아나선 발길에는 봄볕이 가득하다. 일찍 해가 들고 늦게 지는 언덕이라 진달래가 발그레하게 꽃잎을 벌리고 있다. 발아래 밟히는 낙엽들이 내는 소리도 정겨운 길이다. 산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나 있고, 길가로는 온통 진달래 숲이다. 아직 꽃은 몇 송이 피어 있을 뿐, 꽃망울만 탱탱하다.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마치고 반대편 산기슭으로 내려가는데 아내가 몇 걸음 뒤떨어진 내게 들뜬 말을 전한다.

"여기 온통 꽃밭이에요. 현호색 천지예요."

나는 얼른 달려간다. 그러자 아내가 큰 소리를 낸다.

"발 조심. 얘네들이 다쳐요."

현호색이 숲 속에 숨어 피어나는 봄
현호색이 숲 속에 숨어 피어나는 봄 ⓒ 최성수
현호색을 숲에서 찾다.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이런 것일까?
현호색을 숲에서 찾다.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이런 것일까? ⓒ 최성수
걸음을 멈추고 보니, 발아래에 온통 현호색이 지천이다.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제 잎에 몸을 기댄 채 피어 있다. 엎드려 눈을 맞춰 보기도 하고, 꽃송이를 살짝 들어 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은은한 보라색 꽃을 보며, '아! 정말 봄이 오기는 왔구나' 하는 느낌에 젖는다.

실토록 현호색과 눈을 맞추고 돌아온 집 화단에는 몇 해 전 심어놓은 깽깽이풀이 꽃망울을 터질 듯 머금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밟아버릴 듯 작고 여린 꽃망울이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깽깽이풀은 낮은 바람에도 자꾸 몸을 떨고 있다. 꽃 한 송이 피워내기가 저토록 애절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깽깽이풀이 금방 피어날 듯 통통하게 부풀어 있다. 저 꽃망울 속에 봄이 들어있으리라.
깽깽이풀이 금방 피어날 듯 통통하게 부풀어 있다. 저 꽃망울 속에 봄이 들어있으리라. ⓒ 최성수
화단을 돌아보니 온통 봄꽃들이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중이다. 톱나물은 제법 살아 있고, 작약이나 모란도 바알간 새순을 매달고 있다. 돌단풍도, 작년 마른 꽃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산국도 새 잎을 땅 위로 밀어내고 있다.

나는 괜히 화단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마음 가득 차오르는 봄의 향을 느껴본다. 일찍 피는 봄꽃들은 모두 작은 꽃을 피워낸다. 언 땅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이리라. 그 작은 몸짓이 가장 오래 추위가 남아 있는 강원도 이 산골에도 비로소 봄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 뒤를 이어 큰 꽃들이 솟아나고, 그러면 그제야 온 천지가 봄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작은 몸짓임을, 나는 작게 피어난 봄꽃들을 보며 가슴 가득 느낀다. 봄이다, 정말 봄이 오기는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이 골짜기에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아, 그 신비한 자연의 이치를 새삼 느꺼워하는 것은 내가 점점 나이 들어가는 탓이고, 새로 시작하는 계절인 봄이 너무 여리고 고운 까닭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호랑버들개지, 돌단풍, 현호색, 깽깽이풀. 모두들 봄을 전해주는 몸짓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호랑버들개지, 돌단풍, 현호색, 깽깽이풀. 모두들 봄을 전해주는 몸짓이다. ⓒ 최성수

덧붙이는 글 | *현호색, 깽깽이풀 등의 더 많은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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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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