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인 보리소골에도 이제 완연한 봄이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찬 기운이 여전하지만, 한낮에는 제법 따스한 기운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몇 해 동안 같은 자리에서 늘 돋아나던 파가 올해도 가장 먼저 몸을 내민다. 그리곤 저 먼저 봄을 맞으려는 듯, 온갖 풀들이 다투어 돋아난다.
집 뒤 골짜기를 따라 아내와 산책하러 가는데, 개울물 소리가 졸졸 들려온다. 지난 가을부터 말라 있던 개울이다. 봄이 오니 그 마른 개울물에도 물이 흐르고 있다.
자연의 섭리란 이토록 오묘한 것이다. 농사철이 되자 땅이 제 안의 물을 길어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다. 그 물을 받아 나무들 잎을 틔우고, 풀들 몸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 마른 풀들이 그들먹한 숲길로 일찍 깨어난 풀잎들이 조금씩 푸른 기운을 피워내고 있다. 산괴불주머니가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켜고 제 꽃을 피워 올린 길, 마른 나뭇가지에도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마른 풀섶을 눈여겨보며 걷던 아내가 나지막하게 외친다.
"여기 이 꽃 좀 봐요."
아내의 말소리는 행여 잠든 꽃의 단잠을 깨울까 걱정스러운 듯, 낮다. 그러나 경이로움이 가득 배어 있다.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니,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피어 있다. 그 녀석은 마른 풀과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조차 않는다. 나는 꽃 가까이에 쪼그려 앉아 숨죽인 채 녀석을 바라본다. 은은하고 여린 보랏빛이 청초하기 그지없다. 잠시 내린 빗방울에 제 몸을 적신 채 봄이 왔다고 소곤거리고 있다. 둥근털제비꽃이다.
작고 여린 꽃
마른 풀숲에 숨어 있었네.
눈 크게 뜨고 가만가만 숨죽이면
그 꽃 피어나는 소리 들리네.
봄 오는 소리 들리네.
우리 부부는 한참 동안 작은 그 꽃을 바라보며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꽃 피운 저 작고 여린 꽃의 마음을 서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온몸으로 봄을 열어젖히는 저 제비꽃의 힘겨움이, 그 힘겨움의 아름다움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마음을 꽉 차게 만든다.
한식 인사 겸 조상님들 산소를 찾아나선 발길에는 봄볕이 가득하다. 일찍 해가 들고 늦게 지는 언덕이라 진달래가 발그레하게 꽃잎을 벌리고 있다. 발아래 밟히는 낙엽들이 내는 소리도 정겨운 길이다. 산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나 있고, 길가로는 온통 진달래 숲이다. 아직 꽃은 몇 송이 피어 있을 뿐, 꽃망울만 탱탱하다.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마치고 반대편 산기슭으로 내려가는데 아내가 몇 걸음 뒤떨어진 내게 들뜬 말을 전한다.
"여기 온통 꽃밭이에요. 현호색 천지예요."
나는 얼른 달려간다. 그러자 아내가 큰 소리를 낸다.
"발 조심. 얘네들이 다쳐요."
걸음을 멈추고 보니, 발아래에 온통 현호색이 지천이다.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제 잎에 몸을 기댄 채 피어 있다. 엎드려 눈을 맞춰 보기도 하고, 꽃송이를 살짝 들어 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은은한 보라색 꽃을 보며, '아! 정말 봄이 오기는 왔구나' 하는 느낌에 젖는다.
실토록 현호색과 눈을 맞추고 돌아온 집 화단에는 몇 해 전 심어놓은 깽깽이풀이 꽃망울을 터질 듯 머금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밟아버릴 듯 작고 여린 꽃망울이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깽깽이풀은 낮은 바람에도 자꾸 몸을 떨고 있다. 꽃 한 송이 피워내기가 저토록 애절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화단을 돌아보니 온통 봄꽃들이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중이다. 톱나물은 제법 살아 있고, 작약이나 모란도 바알간 새순을 매달고 있다. 돌단풍도, 작년 마른 꽃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산국도 새 잎을 땅 위로 밀어내고 있다.
나는 괜히 화단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마음 가득 차오르는 봄의 향을 느껴본다. 일찍 피는 봄꽃들은 모두 작은 꽃을 피워낸다. 언 땅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이리라. 그 작은 몸짓이 가장 오래 추위가 남아 있는 강원도 이 산골에도 비로소 봄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 뒤를 이어 큰 꽃들이 솟아나고, 그러면 그제야 온 천지가 봄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작은 몸짓임을, 나는 작게 피어난 봄꽃들을 보며 가슴 가득 느낀다. 봄이다, 정말 봄이 오기는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이 골짜기에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아, 그 신비한 자연의 이치를 새삼 느꺼워하는 것은 내가 점점 나이 들어가는 탓이고, 새로 시작하는 계절인 봄이 너무 여리고 고운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현호색, 깽깽이풀 등의 더 많은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