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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발생한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씨의 범행 동기와 배경을 둘러싼 의문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그가 직접 촬영한 동영상과 글 등을 통해서다. 조씨가 품은 적개심은 개인과 사회 모두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충격을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신과 전문의 조중근 박사가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분석한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주>
▲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진 지난 16일(현지 시각) 경찰들이 부상자들을 나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살아서도 조용했다. 외롭고 쓸쓸함. 그리고 고립된 생활과 집단으로부터 소외. 어마어마한 살인극을 저지른 범인이 미국사회에서 사건 전에 남긴 궤적은 그것뿐인 것 같았다.

사건 후에도 순결한 사랑을 꺾어버린 연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폭로하려 했다는 것과 같은 뻔뻔스러운 궤변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질렀다"는 모호한 내용을 담은 메모와 '부잣집 아들', '방탕', '기만적인 허풍쟁이' 등과 같이 증오심을 엿볼 수 있는 단편적인 낙서들만 있었다.

인간 조승희의 감당 못할 분노의 끝

사건에 대한 명백하고도 무수한 현장 증거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살인에 대한 심리적 증거품들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미국사회를 엄청나게 증오해왔었다는 구체적인 자료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내면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적개심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고 그 감당 불가능한 분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를 표현할 마땅한 방법을 몰랐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길이 차단된 것을 확신하고 결국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소통의 부재. 범인과 사회 사이에는 통로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살인의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 아무런 책임도, 영혼도 없는 화학물질의 복합체일 뿐이었다.

솟아오르는 핏줄기를 바라보아도 느낌이 없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비규환, 아우성과 신음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잔인함을 넘어선 무정함. 목을 베는 일을 업으로 삼은 망나니처럼 살인자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인간 조승희와 미국사회는 통하지 않았다.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서 한 한국청년은 그렇게 악명을 남기고 소멸해버렸다. 그는 가버렸지만 교민사회와 한국사회에 남긴 상처는 수습할 길이 없다.

물론 총기를 둘러싼 미국사회의 문제점들이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 사건이 하필 한국청년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애써 감추려해도 쉽게 가시지 않는 충격 그 자체이다.

사악한 범죄자와 공격적 충돌의 상관관계

그 참혹한 사건이 극단적으로 고립된 한국청년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의사소통 문제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건대, 그는 특히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는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분열병과 같은 정신병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분열병 유병율이 전 인구의 1%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신병 진단 여부는 사건의 본질과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분노조절'에 근간이 되는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사악한 범죄자들은 마음 속의 공격적 충동을 정신적 형식 속에서 표현하는 능력 또는 상징화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흉악범들을 심층적으로 면담했었던 찰스 프레드 엘퍼드라는 학자는 이를 '전범주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카테고리로 묶는 능력, 또는 정리하고 분류하는 능력이 이들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분노를 말로 표현하고 상징으로 교환하는 기술이 미숙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흉악범들은 일반인들과 비교해서 도덕적으로 특별히 더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

조승희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회피적이지만, 내부는 증오심과 공격적 충동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영문학 수업시간에 제출한 자신이 쓴 희곡 작품에는 기괴스럽고 폭력적이며 섬뜩할 정도로 공격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희곡 속 주인공은 의붓아버지와 교사 등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들과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폭력과 보복이 교차되는 악순환 속에서 그 갈등은 끝까지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진 지난 16일(현지시각) 사건 직후 경찰들이 다급히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 AP·연합뉴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기애 장애' 환자들

그의 정신 세계는 해결할 수 없는 원초적인 공격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클라인은 이러한 위치를 '편집증적-정신분열성 위치(paranoid-schizoid position)'라고 명명했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유아는 세계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존재들로 구성되어있는 것으로 지각하지만 그러한 현상의 실체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공격성이 외부세계로 투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악함을 사랑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성숙한다는 것이고 만일 이러한 과정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내부의 환상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의사소통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게 되는 바 자기애적 인격장애나 경계선 인격장애 등이 그 대표적인 질환이다.

최근 20~30년 사이에 전통적인 정신분석치료에 저항적이고 자기애 장애를 핵심으로 하는 환자군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들의 특징은 첫째, 자기의 중요성과 위대함에 대한 집착 둘째, 찬사에 대한 무한한 욕구 셋째, 감정 이입의 결핍(타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능력의 결핍) 등 이다.

많은 논의를 거쳐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환자군을 '자기애적 인격장애'라는 범주로 분류하게 되었다.

이들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 환자군의 급격한 증가는 이제 개인의 질병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 또는 사회 병리로 정신분석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자기애적 사회의 도래는 프롬이 지적한 바 '비사회적(asocial)' 개인주의가 만연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자기애적 인격장애 환자들이 깊은 신뢰와 애정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적 열정과 충동에 의해 좌우되는 표피적 인간관계만을 유지하듯 오늘날 우리들 연화된(softening) 나르시시스트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재론적 배려는 비껴가고 싶은 부담스러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현대인-나르시시스트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투쟁이 생산하는 편집증적 불안이 현대인들의 일상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조승희가 왜 그러한 극단적 행동을 저질렀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단순한 행동에도 많은 이유들이 동반되는데, 하물며 이 경악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개인병리와 사회병리, 최악의 조합이 낳은 사태

단선적인 접근으로 쉽게 결론을 내리려는 생각이야말로 위험천만이고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사건은 개인 정신 병리와 사회 문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발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형국이다.

일례를 들자면, 총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면 대량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과 개인이 자신의 분노를 억제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어느 요인이 좀더 주도적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결론은 명백하다. 개인병리와 사회병리가 최악의 조합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조승희의 아버지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민을 택했다고 한다. 돈 없이 출발하는 미국생활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는 어렸지만 부모들은 그를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란 극단적인 애정 결핍을 의미한다. 프로이드는 인간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타인을 향한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만일, 생후 초기에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평생동안 자신이 사랑받고 인정받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과 만남에서 그는 대부분 침묵했고 말을 하더라도 그 표현은 모호했다. 그는 과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자식을 전인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회. 진정성의 교류를 거부하는 사회는 극단적인 경쟁이 필연적이다. 그러한 사회에는 늘 인간관계의 붕괴와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국사회도 미국사회와 절대 다르지 않다. 폭력의 잠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유영철 사건이 신문에 처음 보도된 날 아내에게 버림 받은 한 20대 이혼남은 연쇄살인범이 저지른 범행들은 자신이 늘 꿈꾸던 것이라고 흥분했다.

섬뜩한 일이다. 버지니아에서도 서울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살인기계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일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총이 쥐어져서는 절대 안되는, 극단적으로 미숙한 인간이 총을 손에 넣게 된다"고.

어디나 있을 수 있는 '살인기계'들

총기 자유화에 관한 문제는 미국사회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까지 그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한국사회에 책임이 있다. 인간 조승희는 어정쩡하게 그 경계에 서 있다 사라졌다.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것이 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확연히 금긋는 일이 항상 뿌듯한 것이기만 할까? 소통이 막혀버려 안으로 안으로만 쌓아가던 분노가 결국 최악의 비극을 몰고 온 이번 사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좀더 개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해외에 나가 살면서까지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 살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제 떨쳐버려야 국제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늘 못마땅한 점이 있다. 책임을 통감하는 전문가 집단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가슴을 찢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해야 할 사람들이 마치 자신은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교회와 절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연쇄살인 사건이 터질 때도, 참혹한 유괴 현장에도 무덤덤하다. 자성의 목소리 한 마디가 아쉽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 등과 같은 다른 전문가 집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책임에 걸맞은 자세가 요구된다.

#심리학#버지니아텍#총기난사#조승희#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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