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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19일. 조간 신문을 펴 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독자들은 장문의 낯선 기고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3만5000단어에 달하는 칼럼의 제목은 '산업사회와 그 미래'.

후일 소위 '유나바머 메니페스토(선언, 성명)'로 알려진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수 년에 걸쳐 주로 대학교 연구소와 민간항공사를 겨냥해 우편물 폭탄을 지속적으로 발송해 온 무정부주의자. 그의 폭탄테러로 3명이 목숨을 잃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이런 범죄의 특징때문에 FBI는 '대학교(University)'와 '항공사(Airline)'의 첫자를 따 그를 '유나바머(Unabomber)'라는 별명으로 불러왔다.

하지만 '유나바머 메니페스토'가 미국의 양대 일간지에 실리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FBI는 후일 비슷한 동기를 지닌 다른 범죄자가 자신의 주장을 알리는 수단으로 유력 언론을 악용하는 선례가 생길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두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폭탄테러를 재개하겠다는 유나바머의 협박에 굴복해 결국 그의 글이 실리게 된 것.

세상을 향해 강렬하게 외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고, 언론의 생리를 잘 알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유나바머와 조승희는 닮은 점이 많다.

NBC를 통해 공개돼 세상을 또 놀라게 한 조승희의 동영상 메시지는 UCC 시대에 잠재적 증오범죄자가 어떻게 세상과 자멸적으로 소통하려 할 지 그 미래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승희는 아침 7시 기숙사에서 1차 살해를 저지른 뒤 그의 방으로 돌아가 웹캠을 통해 무려 27개에 달하는 퀵타임 동영상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FBI가 만든 '유나바머' 몽타쥬
조승희의 발언은 물론 그를 배신했다는 신원미상의 연인에 대한 사적 증오와 분노로 가득하다. 하지만 자신을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과 동일시 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힘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위해 순교한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조승희의 동영상은 어쨌든 세상에 보내는 '메니페스토'라고 할 수 있다.

1차 총격의 심리적 충격, 그리고 2차 총기난사라는 참극을 앞 둔 급박한 상황에서 조승희는 왜 굳이 동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CD롬에 복사해 NBC 방송국에 우편으로 보내는 주도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을까? 자신이 저지를 범죄의 '당위성'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묘한 심리가 읽혀진다.

조승희는 그의 총기난사가 반드시 뉴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영상보도자료'를 만들어 유력 방송사에 보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 자신의 주장이 방송되리라는 것을 익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23년의 짧은 생을 통해 평생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던 조승희는 총기난사라는 비극적 뉴스이벤트와 동영상 보도자료라는 극악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분노를 온 세상에 알리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유나바머나 조승희나 범죄를 저지른 근본적 이유는 평소 세상과 소통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폭발적으로 표출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진작에 훨씬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세상과 의사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이다.

조승희의 동영상은 인터넷, 멀티미디어 그리고 UCC로 상징되는 미래의 네트워크 사회에서 범죄자가 과연 어떻게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려 할지 짐작하게 하는 징조라고도 볼 수 있다. 유나바머는 그 시대의 유력언론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라는 미국의 양대 일간지를 선택했지만, 조승희는 스스로 동영상 UCC를 만들어 NBC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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