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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쯔전의 인터넷기념관 모습.
허쯔전의 인터넷기념관 모습. ⓒ 허쯔전기념관
그 이후에도 마오쩌둥은 재혼하지는 않지만 임종을 지켜주었던 열차 승무원 출신의 장위펑(張玉鳳)까지 많은 여성들을 그 곁에 두었다. 봉건 전통과 혁명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사랑의 아픔이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의 여성편력으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1984년 4월 19일,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인 허쯔전이 75세를 일기로 상하이(上海)에서 별세했다. 허쯔전은 1909년 장시(江西)성 지주의 딸로 태어나 교사로 활동하다가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27년 농촌무장봉기활동을 하다가 혁명의 근거지였던 징강산으로 흘러들게 되고 그곳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1928년 결혼하게 된다.(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에는 1930년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화통신 등의 중국자료는 1928년에 결혼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허쯔전이 징강산에서 닭 두 마리와 술 두병을 들고 마오쩌둥을 위문하러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동지애와 사랑으로 뭉친 부부였다. 1935년 허쯔전은 임신한 몸으로 1만 여km의 대장정을 완수해낸다. 허쯔전은 1929년 장녀 마오진화(毛金花)을 낳고, 1930년 둘째 남자아이를 낳지만 바로 죽고, 1932년 장남 마오안홍(毛岸紅)을, 1935년 장정 중에 딸을 낳아 농민에게 맡기고, 1936년 산베이(陝北)에서 딸 리민(李敏)을 낳는 등 모두 3남 3녀를 낳지만 대장정과 혁명과정에서 행방불명되거나 어렸을 때 죽고 리민만이 생존해 있다.

더구나 대장정 때 수류탄 파편에 상처를 입은 허쯔전은 남편 마오쩌둥의 외도까지 겪게 되는데 바로1937년 여름, 통역원 우광웨이와의 스캔들이다. 결국 허쯔전은 마오쩌둥과 우광웨이와의 애정관계를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고발하게 되고 마오쩌둥은 이를 부인하고 이혼을 신청하게 되니 허쯔전과 우광웨이는 모두 연안에서 추방된다.

허쯔전은 1937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고 그곳에서 홀로 다섯 번째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도 곧 죽고 만다. 그녀는 이후 1947년 8월 귀국하여 저장(浙江)성 여성부에서 일하다가 1979년에는 제5기 정협위원으로 선발되기도 한다. 그리고 1984년 4월 19일 지병이 악화되어 상하이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정브리핑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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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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