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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풀이 자라는 언덕
파란풀이 자라는 언덕 ⓒ 이승철
요르단의 느보산을 출발한 버스는 구불구불 내리막길을 한없이 달렸다. 주변은 그야말로 새파란 풀 한 포기 보기 어려운 황량한 사막이다. 그런데도 그런 산악지역 곳곳에 수십, 수백 마리씩의 양떼가 무엇인가를 뜯으며 이동하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저 사람들이 바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입니다."

산 아래쪽의 작은 도시 변두리에는 대부분 천막촌으로 형성된 마을이 보인다. 움막 같은 것을 쳐놓고 사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들이 바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라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가장 많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 바로 요르단이라고 했다.

"이 지역 어느 곳인가가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싯딤골짜기일 것입니다."

한참을 더 내려간 버스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길가에서 어쩌다 만나는 유일한 나무는 한 그루씩 앙상한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는 싯딤나무라고도 불리는 아카시아나무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달려 내려간 골짜기의 풍경이 아주 놀랍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골짜기 길을 동쪽으로 조금 더 달리자 주변이 푸른 들판으로 변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달려가고 있는 도로 왼편은 밀밭과 오렌지 밭 등 푸른빛이 가득했는데 그쪽 지역이 바로 요르단 강이 흐르는 곳이라고 했다.

길가에는 푸르게 자란 밀밭들이 보이고 푸른 잎이 싱그러운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넓은 밭을 가득 메운 비닐하우스들이었다. 겨울철 우리나라의 어느 들녘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안에는 싱싱한 야채가 자라고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을 것 같은 상상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싯딤골짜기 풍경
싯딤골짜기 풍경 ⓒ 이승철
염소떼와 목동
염소떼와 목동 ⓒ 이승철
동쪽의 헬몬산에서 시작한 강줄기는 갈릴리 호수에서 멈췄다가 다시 사해를 향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그런데 우리들이 달리고 있는 길 왼편이 바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흐르는 요르단강의 유역이라는 것이었다. 요르단강의 양쪽 유역은 사막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비옥한 땅이었다.

"3일 전에 패트라에서 암만으로 가는 사막 가운데 길가에서 우리들이 값싸게 사먹은 그 과일들도 사실은 모두 이곳에서 재배한 것들입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땅도 비옥하고 과일이나 곡식의 생산량도 아주 많아서 요르단 국민들을 먹여 살릴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수출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저 건너편이 바로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점령한 후 돌려주지 않는 요르단 강 서안이지요."

강 건너편이 바로 옛 요르단의 영토였다가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땅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비옥하고 강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아주 귀한 땅이라고 한다.

조금 더 달리자 가끔씩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이 중동 땅에 들어온 이래 차가 많아서 길이 막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것도 대도시인 암만이나 다마스커스라면 모르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길이 아닌가.

길이 막히자 앞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시끄럽기 짝이 없다. 어떤 차량은 길 가운데 차를 세워 놓고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들고 나오는 사람도 보인다. 그러니 차가 더 막힐 수밖에. 그래도 이 사람들은 급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천하태평인 표정들이다.

밀밭풍경
밀밭풍경 ⓒ 이승철
길가의 가시나무 아래에서 쉬는 농부
길가의 가시나무 아래에서 쉬는 농부 ⓒ 이승철
길가의 허름한 가게들은 대부분 과일을 팔거나 양고기와 옷가게, 그리고 업종을 구분할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을 늘어놓은 모습들이다. 건물들도 아주 낡거나 대충 지은 집들이어서 무슨 피난민 촌이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막혔던 길이 뚫리자 버스는 다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길가의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의 모습은 한가로워 보였지만 양떼를 지키는 목동의 모습은 역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밀밭에서도 풀을 뽑는지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것은 멀리 보이는 앙상한 바위산과 사막을 배경으로 풍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주민들의 모습은 여전히 가난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길이 붐빌 정도로 생산량이 많고 유통이 활발한 농촌이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삶이 우리농촌의 현실을 보는 듯 씁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가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수로에 물이 흐르고 굵은 플라스틱 관이 요르단 강물을 이용하기 위한 관개수로로 이용되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현대화된 농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 이제 곧 국경에 도착합니다. 요르단의 출국은 어렵지 않겠지만 이스라엘 입국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곳이니 준비 단단히 하십시오."

순간적으로 일행들이 긴장하는 표정이다.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입국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나라이기 때문이다.

밭과 비닐하우스 풍경
밭과 비닐하우스 풍경 ⓒ 이승철
요르단의 무궁화꽃
요르단의 무궁화꽃 ⓒ 이승철
버스가 곧 멈추어 섰다. 요르단 국경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출국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여권을 확인하고 여행용 가방들을 검색대에서 통과하여 이스라엘 입국 심사를 받기 전, 3일 동안 함께했던 가이드 안 선생, 그리고 현지인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다시 요르단으로 돌아갔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시는 겁니다.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시고요."

여행사 인솔자가 우리들에게 당부를 했다. 모두들 무슨 소리냐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시죠? 이스라엘이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는 것, 이곳에선 영어를 잘하면 골치 아픈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몇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는 일행 한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이스라엘 공항에서는 그들이 영어나 히브리어로 묻는 질문을 알아듣고 서툴게나마 답변을 하게 되면 이것저것 묻거나 서류에 적어내야 하는 것들이 보통 많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에 한 번 몇 마디 대답을 했다가 상당히 골탕을 먹었다니까요. 오기 전에 누구를 만났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혹시 누가 물건을 부탁하여 가방이나 휴대품 속에 같이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는 둥, 이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그러니 아예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척 하고 있으면 몇 마디 묻다가 그냥 통과 시킵니다."
"그럼, 여긴 영어를 할 줄 몰라야 편한 곳이네요."

우리 일행들은 이곳 입국심사장에서는 모두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기로 작정 했다. 꼭 필요한 말은 여행사 가이드가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잠시 후 입국심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심사대에는 상냥해 보이는 젊은 여성들만 앉아 있었다.

오렌지밭 풍경
오렌지밭 풍경 ⓒ 이승철
도로변의 과일가게
도로변의 과일가게 ⓒ 이승철
여권을 보거나 심사를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곳곳에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들은 서로 적대시 하는 나라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국경에 배치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 도무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다른 중동국가들은 거의 남성일색이었는데 말이다.

심사가 시작되자 창구 안쪽의 여성심사관들이 몇 마디씩 묻는다. 간단하게 "김아무개씨네요" 한다든가, "나이가 몇이세요?" 또는 "여행 즐거우셨습니까?" "한국에서 오셨군요, 맞지요?" 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아마 우리 일행들이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듣거나 할 줄 아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일행들은 하나같이 벙어리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양, 멍청한 눈으로 그녀들을 멀끔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맨 먼저 심사대 앞에선 여행사 인솔가이드가 미리 말을 했다고 한다. 이번 여행팀은 영어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질문 사항이 있으면 모두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가이드의 말대로 아무도 말을 알아듣고 대꾸하는 사람이 없자 심사는 정말 싱거울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녀들은 우리 일행들의 얼굴 한 번 쳐다보고 여권 한 번 보는 것으로 너무 쉽게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차례로 심사대 앞에선 여성 한 명이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녀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변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사대의 여성들이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미인들이십니다" 하고 칭찬까지 한 것이다. 순간 근처의 우리 일행들뿐만 아니라 심사대의 이스라엘 여성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르단 국경 출국장으로 가는 길
요르단 국경 출국장으로 가는 길 ⓒ 이승철
모두 영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거나 말할 줄 모른다고 해서 의례적인 질문만 한 마디씩 던져 보았는데 맨 마지막에 갑자기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심사대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상했던 까다로운 질문공세를 펴지 않고 생긋 웃으며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통과시킨 것이다.

"까다롭다더니 별 것 아니네. 호호호. 괜히 잔뜩 겁먹었잖아?"

여권을 받아들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나오는 그 여성 일행을 보며 다른 일행들은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지만 당사자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잔뜩 긴장한 일행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을까. 나이가 들었어도 장난기가 가득한 일행의 농담에 모두들 유쾌한 웃음보를 터뜨리며 가슴 졸이던 긴장을 풀어버릴 수 있었다.

일행들의 세심한 준비로 짐 검사대에서도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여행은 매우 순조로운 편이었다. 이스라엘 입국장을 통과한 우리 일행들은 곧 바로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를 만나 전세버스를 타고 벧산공원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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