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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립공원인 벧산공원 꽃밭 뒤에 전시된 대포
이스라엘 국립공원인 벧산공원 꽃밭 뒤에 전시된 대포 ⓒ 이승철
"우와! 저 풀밭 좀 봐요?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요르단을 거쳐 이스라엘로 입국하는 동안 까다롭다는 입국심사 때문에 긴장했던 일행들은 국경초소를 벗어나자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창 밖의 풍경도 정말 놀랍게 달라져 있었다.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는 잘 정리된 농경지와 푸른 들판에 가득한 밀밭과 풀밭, 그리고 대추야자나무 숲이 일행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요르단의 싯딤 골짜기에서 비옥한 땅이라고 말했던 요르단강 동안의 풍경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뭐랄까? 요르단강 동안의 풍경은 비옥하지만 왠지 초라하고 가난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곳 이스라엘 쪽의 풍경은 길이나 농경지가 잘 정리되고 넉넉해 보여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버스는 잠깐 달려 역시 깔끔하게 잘 정리되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들어섰다.
"자! 여기가 이스라엘의 국립공원인 벧산공원입니다. 여기서 잠깐 쉬며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드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지역의 현지 가이드인 서 선생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벧산 국경 풍경
벧산 국경 풍경 ⓒ 이승철
한식 도시락 때문이었다. 요르단과 시리아를 돌아본 3박 4일 동안 우리 음식을 전혀 먹을 기회가 없었던 일행들은 모두 우리 음식을 한창 그리워하고 있었다. 공원 잔디밭에 자리를 잡은 일행들은 우리 음식인 한식 도시락으로 모처럼 신나는 점심을 먹게 되었다. 한식이래야 현지 교민이 준비한 도시락이어서 대단할 것도 없는 음식이다.

그러나 며칠만에 맛보는 우리 음식이라 모두들 정신없이 맛있게 먹는다.
"역시 우리 음식이 최고야! 이 쌀밥에 김치, 이거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겠네."
외국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우리 식성과 우리 음식의 진면목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다.

국경에서 긴장했던 마음도 모두 풀어지고 모처럼 우리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 나자 모두들 만족한 표정이다. 긴장도 풀리고 배불리 먹고 나자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의 경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벧산공원은 이 나라의 국립공원으로 공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름답게 가꿔놓은 곳이었다.

"히야! 꽃밭 속의 저 대포 좀 보세요!"
정말 가까운 곳의 꽃밭 속에 엄청나게 커다란 대포가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지금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1967년의 6일 전쟁 때 사용했던 낡은 대포를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과일농장과 푸른 언덕
과일농장과 푸른 언덕 ⓒ 이승철
그런데 살상무기인 대포가 아름다운 꽃밭 뒤에 세워져 있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꽃밭과 대포라. 평상시에는 평화롭지만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이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이 벧산은 고대 이스라엘의 사울왕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에게 패하여 전사한 후에 바로 이 벧산의 성벽에 못 박히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머리는 다곤신전에 바쳐졌던 곳이지요."

이 공원과 함께 지금은 인구 3만 여명의 작은 국경도시인 이 벧산은 로마시대의 유적 중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와 더불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이 도시는 이스르엘 평원과 벧산 평야를 통하여 길르앗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갈릴리 아래 지역에서 가장 교통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다.

남쪽 길은 요르단강을 따라서 제리코와 사해를 거쳐 홍해로 내려가며 또 제리코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 있다. 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로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요르단강을 건너 길르앗 라못으로 갈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하롯 계곡을 지나 이스르엘 평야의 해변 길과 만난다.

벧산평야와 국경 검문소
벧산평야와 국경 검문소 ⓒ 이승철
"벧산이라는 도시이름은 '산신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무려 9천년이라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랍니다."

지혜로운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 시대에는 12개의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무너지면서 BC 732년에 앗시리아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 뒤 한때는 강성했던 이집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이 도시의 옛 유적지에는 이집트지배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나 아쉽게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이 도시는 지역적인 특색으로 그리스시대에는 '스키트 폴리스'라 불리며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막강한 도시국가로 계속 발전하게 된다. 짧은 기간 하스모니안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지나 BC 63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인다.

공원 안의 거목
공원 안의 거목 ⓒ 이승철
공원 잔디밭에서 한식 도시락으로 맛있는 점심
공원 잔디밭에서 한식 도시락으로 맛있는 점심 ⓒ 이승철
서기 66~70년에 유대인 제1차 반란으로 잠시 유대인들의 점령지가 되었으나 70년 이후에는 로마에 의한 통치가 고착되게 되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황제 때는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운다. 그 뒤 바로코바 반란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서기 161~180)에 현재 발굴된 로마시대 도시의 대부분이 건축되었다.

도시의 곳곳에는 고고학계에 의하여 발굴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다수 남아 있으며, 가나안시대에는 갈릴리호수와 요르단 계곡, 그리고 레바논과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던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다.

"그럼 저곳이 바로 벧산 평야입니까?"
공원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역은 제법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왼쪽의 흙무더기 사이로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피어 있는 너머가 푸른 초원이었다.

"아닙니다. 그쪽은 갈릴리호수 아래 지역입니다. 벧산 평야는 언덕 너머에 있지요. 도시도 그쪽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장미꽃 뒤로 멀리보이는 곳은 요르단 땅
장미꽃 뒤로 멀리보이는 곳은 요르단 땅 ⓒ 이승철
비잔틴제국시대는 물론, 서기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될 때까지 이 도시는 그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었다. 서기 661년 이후 시라아의 우마야드 왕조가 지배할 당시만 해도 거주민이 1만 5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경제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십자군이 원정했을 때는 나사렛과 티베리아, 그리고 다볼산을 연결하는 십자군들의 중요한 보급기지 겸 진지가 되었다. 십자군이 물러간 1263년부터 아랍왕조의 지배에 들어간 이후 1949년 이스라엘과 아랍의 독립전쟁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 영토가 된 곳이다.

공원 안에는 잘 가꾸어진 나무와 꽃, 그리고 유적들과 함께 이스라엘이 독립전쟁을 치를 때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묘지에는 지난 1967년 6일 전쟁 때 죽은 병사들의 무덤도 함께 하고 있었다.

벧산공원과 묘지풍경
벧산공원과 묘지풍경 ⓒ 이승철
"그런데 이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을까요?"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을 둘러보며 누군가 생뚱맞은 질문을 던진다.
"보세요. 이 아름다운 공원과 저 푸른 초원, 그리고 과일밭을, 지금까지 우리들이 돌아본 그 사막들에 비하면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잖아요."
그러고 보면 맞는 말이다. 같은 사막지역에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요르단과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서도 보지 못했던 참 풍요로운 풍경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더구나 심심하면 터지는 테러와 전쟁은 또 어떻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다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땅에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평화로운 세월이 있었던가.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끝없이 이어진 전쟁, 수 천 년 동안의 식민지 생활,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독일에 의하여 수백 만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던, 그야말로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끔찍한 수난을 당한 민족이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던가.

왼쪽으로 가면 수도 텔아비브
왼쪽으로 가면 수도 텔아비브 ⓒ 이승철
티베리아 입구의 로마시대 유적지
티베리아 입구의 로마시대 유적지 ⓒ 이승철
그러나 1948년 5월 독립을 선포한 이래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도 폐허를 옥토로 가꾸어 풍요로운 삶을 일구어낸 그들의 저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랍세계의 한 가운데 외로운 섬 같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 대한 첫 인상은 한마디로 놀라움이었다.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요르단과 가까이에 있는 이스라엘의 국경도시 벧산은 오랜 고도로서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대부분 돌아보지 못했다. 다만 벧산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예정지인 티베리아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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