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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막기'식으로 카드 대출금을 변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1개월 이후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지금 당장'만 생각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이 경우, 카드 사용자의 경제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과, 변제 기한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점은 카드 사용자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경제력이 약한 카드 채무자가 '근시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시안은 비단 개인 채무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성이 아니다. 오늘날 동북아 핵 문제에 관한 미국의 관리능력에서도 유사한 측면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국력이 예전처럼 '절대 최강'이 아니라는 점과, 동북아에서 '팍스 아메리카나'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 미국의 시야는 근시안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핵 관리능력 역시 다분히 '카드 돌려막기'식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제2차 북미 핵 대결과 6자회담이 잘 마무리되어 북한이 '공식적'인 비(非)핵보유국으로 남는다면, 지금 당장에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에 긍정적인 국면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 향후 북·미 간에 체결될 평화협정 혹은 합의서가 훗날 잘 이행된다 하여도, 경우에 따라서 북한이 언제라도 또다시 핵보유국의 위상을 가지려 할 가능성이 있다. 설령 미국이 대북 약속을 잘 이행한다 하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 북한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는가?

북한이 북미관계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북·미 간의 평화협정을 전제로 '공식적 핵포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지금 당장에는 동북아의 '절대 최강'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공식적'으로 핵을 포기한다 해도 대미관계만 안정적으로 되면, 굳이 핵보유국의 지위를 갖지 않더라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미국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미국이 지금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북·미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미국에 대한 일본·대만의 불신이 한층 더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당장에는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기는 어렵겠지만, 팍스 아메리카나에 금이 생기는 징후만 보이면 두 나라 역시 얼마든지 미국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북미관계가 잘 해결되어 6자회담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중국 역시 지금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미-중 협력체제는 다분히 핵 문제에 대한 공동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북·미 양국이 평화협정을 맺게 되면, 그만큼 미중 관계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북미관계 정상화 이후에 막상 중국·일본·대만 등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면, '미국이 동북아 최강'이라는 전제하에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공식적으로 핵을 포기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고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설령 미국이 대북 약속을 잘 이행한다 하여도 그것만으로 북한의 안보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은 또 다른 도전자들을 목표로 '핵 드라이브'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향후 북한이 항구적으로 비핵보유국으로 남는다 하여도, 경우에 따라서 한국·일본·대만이 핵보유를 추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북한만 비핵화를 하면 한·일·대만의 비핵화도 담보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에는 그런 생각이 맞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앞으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동북아 패권은 궁극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전으로 이미 금이 간 미국의 패권은 앞으로 지속적인 하향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런데 동북아에서 미국의 퇴장은 핵 문제와 관련하여 중대한 파장을 낳게 된다. 미국이 퇴장한다는 것은 동북아 위성국들에 배치되어 있는 미국의 핵무기도 동시에 철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위성국들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든 말든 간에 독자적 안보체제의 구축을 위해 핵무장에 나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설령 북한이 핵을 갖지 않더라도 중국·러시아가 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러시아의 핵무기가 지금 당장에는 미국의 패권 때문에 미국 위성국들을 위협하지 못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소멸하면 양국의 핵무기는 미국 위성국들에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등 미국 위성국들의 핵무장은 필연적이 사실이 될 것이다.

냉전시대에 친미진영은 한결같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느라 독자적 핵개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인 반미진영에서는 중국과 구소련이 독자적 핵개발에 성공했고 북한도 핵개발을 추진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퇴장하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 왔던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중국·러시아 등의 위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하에서 '카드 돌려막기'식 비핵화가 조성될 수밖에 없다. 대만이 핵무장을 선언하면 다른 나라들이 모두 대만 비핵화를 위해 달려들고, 일본이 핵무장을 선언하면 대만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이 모두 일본 비핵화를 위해 달려드는 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대만·일본 등이 핵보유를 추진하게 되면, 지금 북한을 상대로 벌어진 상황들이 양국을 상대로 또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드 돌려막기의 결말이 그렇듯이, 미국 퇴장 이후 벌어질 위와 같은 상황은 결국 모든 동북아 국가들의 핵무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렇게 카드 돌려막기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미국 퇴장 이후 한동안은 어느 나라도 역내의 단독 패권국가로 떠오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패권국가가 없는 과도기 동안에는, 이번에는 이 나라의 핵보유를 막고 다음에는 저 나라의 핵보유를 막느라 동북아 국가들이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미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국의 역내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데다가 미국이 퇴장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동북아 핵 관리 능력에 중대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다가올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면, 지금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비핵화가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6자회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미국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북미평화협정 이후 미국이 위성국들의 도전을 받게 될 때에도 과연 북한이 미국과의 약속을 신뢰하고 공식적인 비핵보유국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당장 북한 핵을 제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곧 다가올 장래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는 듯하다.

미국의 패권이 소멸하면 그동안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북아 위성국들이 갑작스레 비핵지대가 되어 중국·러시아의 핵무기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대만 등이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가 있다. 그때는 북한의 핵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대만 같은 경제대국들의 핵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의 핵만 제거하면 일본·대만 등의 핵무장 도미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자국이 동북아에서 퇴장한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일단 화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서 그런지,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염려를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위와 같이 미국이 추진하는 한반도 및 동북아 비핵화는 조만간 다가올 더 큰 위험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근시안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카드 돌려막기로 '25일의 결제'(북한 비핵화)만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1개월 후의 더 큰 고난'(미국 퇴장 이후의 동북아 핵무장 경쟁)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관계가 안정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이때에 동북아 국가들은 북한 핵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 아니라, 향후 보다 항구적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를 핵의 무풍지대로 만들기 위한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고려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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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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