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밤에는 SBS의 <야심만만, 만명에게 물었습니다(이하 '야심만만')>가 절대강자였다. 질문 주제의 내용이나 만 명의 사람들의 대답보다는 사실 야심한 밤에 술술 늘어놓는 연예인들의 사사로운 얘기들에 혹했다.
이효리가 키스할 때 입속에서 종이학을 접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야심만만>에서였다. 딱히 기다렸다 찾아서 보는 열성은 아니더라도 월요일 밤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야심만만>을 보곤 했다.
슬슬 <야심만만>이 지겨워졌다. 김제동이 MC에서 빠지면서 가벼움과 진지함의 배합 비율이 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지만, 박수홍과 강호동이 그럭저럭 상반된 분위기의 균형을 갖추면서 '연예인 사담(私談)쇼'로서의 진면목에 크게 훼손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야심만만>에서 털어놓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준비된 솔직함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그들의 속살 같은 사담도 흥미를 잃어갔고 이 시간에 뭐를 볼까 궁싯거리기 시작했다.
월요일 밤, 아빠들은 어떤 프로그램을 볼까?
아빠들은 월요일 밤에 어떤 프로그램을 볼까? 아니 월요일이 아니더라도 티비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마음 놓고 즐겨 볼까?
아빠들이 힘겨워진 지 오래되었다. '고개 숙인 아빠'라거나, '기러기 아빠'라거나, 아빠에 대한 용어들이 만들어지고 아빠들의 위기가 사회문화적인 현상으로 다루어진 지는 21세기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인생이 힘겹고 두려워진 아빠들을 다룬 한국 영화들도 많이 나왔다. 특이하게도 난데없이 아들이나 딸이 생겨서 당황하는 아빠들에 대한 얘기들이 심심치 않다. 없는 줄 알았던 아들이 나타나서 아빠 노릇을 요구하자 '아빠됨'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배운 적도 고민해 본 적도 없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아빠들 말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아빠들이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해 벌어온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임무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가정 내에서 다른 가족들과 감정적인 유대를 만들고 정서적인 교류와 소통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IMF 사태 후에 부양자로서의 경제적인 지위가 흔들리자 오히려 가정 내의 취약했던 입장이 부각된다. 어쩌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해온 듯하지만 실상 감정적으로 소외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삶에 문득 나타난 아내, 그리고 그 손에 이끌려 함께 나타난 아들 혹은 딸. 이들의 존재는 가정 내에서 '아빠됨'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아빠 되기를 익히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점이다.
<야심만만> 퇴색하면서 눈에 띈 <불량아빠클럼>
<야심만만>의 야심이 퇴색하면서 만만한 프로그램이 되어갈 무렵 눈에 띈 것이 KBS의 <그랑프리쇼 - 불량아빠클럽(이하 '불량아빠클럽')>이었다. 30, 40대 남성들이 주축이 된 오락 프로그램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40대 조형기가 맏형뻘이고, 30대 김구라가 막내뻘이다. 결혼해서 십여 년이 넘는 베테랑들이지만 지금의 처지는 어쩔 수 없는 불량아빠들이다. 이들이 나와서 한 가정 내의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한다. 왜 아내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아이들과 대화하기 어려웠는지를 터득해 나가는 데 이를 돕는 역할은 주로 다양하게 초대되는 게스트들의 몫이다.
예를 들면 양희은과 박미선이 초대된 주에는 아내와 남편의 대화에서 빚어지는 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하고(양희은은 "이해는 못 할망정 오해는 하지 말자"는 말로 아내와 남편이 어떻게 서로 표현을 오해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혜가 보인다), 황보와 서지영이 초대된 주에는 아빠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20대 초반의 팽팽한 연예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다가 <불량아빠클럽>을 보자 흥미가 생겼다. 스스로 불량아빠라 칭하는 것은 이미 '아빠됨'을 요구받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단계는 지난 것이다. 이들은 불량함을 벗고 좋은 아빠 되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명확하게 좋은 '아빠 되기'를 위한 소통의 장을 주장하지 않는 것 같았다. 냄비 퀴즈 같은 경우 사실 아빠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출연진들의 재치와 입담에 기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황보와 서지영이 초대되었을 때 나눈 대화의 일부가 아빠와 딸의 관계였을 뿐 나머지는 자식된 동일한 입장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등 내용이 일관되게 맥을 형성하지 못했다.
표류하던 <불량아빠클럽>, 결국 종착... '가정에 달' 앞둔 종영이 더 아쉽다
그러더니 이 프로그램이 최종회란다. 지난 4월 23일 최종회 특집을 방송했다(4월 30일부터는 일요일 오전에 방송되던 <미녀들의 수다>가 이 시간에 방송된다. 한 마디로 밀려난 것이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보았다.
이 최종회의 구성을 보면 왜 <불량아빠클럽>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했는지 한 가지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전의 고정된 형식을 탈피해서 출연진의 친구들이 나와 실루엣 증언을 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질문이 "나는 내 친구의 불량한 짓을 알고 있다"와 "내 친구는 술만 먹으면 이런 짓 한다" 같이 중년 남성들의 뒤늦은 '아빠됨'에 대한 요구보다는 출연자 각각의 '불량스러움'에 초점을 더 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의 종영이 못내 아쉽다. 출연자 중 최고령인 조형기는 "가정에서 아빠의 위치가 어때야 하는가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를 정확히 짚어주는 말이었다. 엉성한 산수 문제 풀면서 낄낄대며 냄비 좀 맞으면 어떠랴, '아빠됨'이란 원래 일상적인 것인데 집중적으로 족집게 과외를 할 수 없지 않은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래서일까. 극장가에 아버지 신드롬이란다. 느닷없이 등장한 딸이 '아빠됨'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패턴의 <눈부신 날에>가 있고, 무기수 아버지가 15년만에 처음으로 아들을 만나는 <아들>이 있다.
우리, 당황해 하는 아빠들을 구박하지 말고 가족들의 유대 안으로 끌어들여서 이야기를 해 주자. 불량 아빠가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 노력하자고. 프로그램은 없어져도 삶은 계속되니까.
가정의 달을 코앞에 두고 프로그램을 접는 것이 얄궂다. <미녀들의 수다>가 불량 아빠들을 밀어낸 것이 더 속상하다. 월요일 밤에 죄민수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