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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8일부터 22일 동안 열렸던 <쾰른 아트페어>의 어느 독일 측 갤러리 부스에 한 한국의 젊은 작가가 작품을 설치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가 설치하고 있는 작품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각 작품들에 수도꼭지가 부착되어 있다는 점, 나 역시 오늘 하루 중 에 몇 번의 수도꼭지를 만났던가! 그런데 작가 강태훈에게 행운을 부른 이 수도꼭지에는 다중의 울림이 있다.

100% 지방산 작가의 유럽 진출기

▲ 4월 27일에 오픈하는 <카프리스 혼> 갤러리 개관전에 전시될 강태훈의 작품.
ⓒ 카프리스 혼
아트페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아트 콜론(Art Cologne)은 젊음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2007년에도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5개의 한국 갤러리가 참여한 이번 행사에 아직 외국어에 능숙하지 못한 한 한국의 젊은 작가는 독일의 어느 갤러리 부스에 4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주목할 사항은 이 젊은이가 외국 이민 경력이나 유학파도 아닌 한국산, 그것도 순수한 100% 지방산 작가로서 불과 두어 달 전에는 아르바이트 겸 집안일을 돕고 있던 평범한 부산의 청년 작가 중 한 명이었다는데 있다. 그의 작품 성격상 벌써 아트페어에 진열된다거나 이미 전시도 하기 전에 독일에서 3점이 판매될 줄은 더욱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정작 이번 쾰른 아트페어에서 베를린의 <카프리스 혼>이라는 갤러리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전속작가 자격으로 초대된 강 태훈의 개인적 소감은 일종의 ‘운명의 흉폭성’에 대한 비유, 그 자체였다. 여하간 그는 이번 계기로 많은 작가들이 꿈꾸는 유럽 미술계에 진출하게 된 셈인데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촉망받는 청년작가로 소개될 뿐 아니라 작품 판매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최근 부산의 대안 공간 <반디>를 통해 날아온 이 희소식은 부산 미술계를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2년 전에 부산 동의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강태훈이다. 학부와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기간제 모교 강의뿐 ,여느 젊은이들이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더욱이 순수 예술을 전공한 젊은이들은 취업의 기회조차 기대하기 힘들며 ‘빛 좋은 개살구’인 프리랜스 작가 생활을 용감하게 영위하든지 아니면 다 시 한번 진로에 대한 비장한 결단과 자신에 대한 재투자를 고려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은 피할 수 없는 젊은 예술가들의 현실이자 운명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방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추가된다. 일반적으로 지방작가들의 풀코스란 모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진학하거나 유학길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중앙에서의 인정받기’라는 다시 말해 ‘서울에서의 성공적인 전시’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후 내디딜 수 있는 것이 바로 ‘작가로서’ 국제무대의 성공적인 진출이다. 하지만 지방작가 강태훈의 경우는 이런 구(久)상식을 뒤엎은 신(新)상식을 창출했다. 바로 이 점이 지방의 젊은 작가들을 설레게 한다.

세계의 중심은 당신의 발과 발 사이에...

이 겹겹의 절차를 가로지르게 도운 이는 그동안 묵묵히 대안 공간 <반디>를 이끌어 왔던 작가 김 성연이다. 그는 올 초 부산의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자 1천부를 발행해서 국 내외 미술관과 갤러리 그리고 비엔날레 등에 발송한 바 있다. 지금까지 강 태훈은 대안 공간 <반디>와의 인연으로 1회의 개인전과 두어 차례의 그룹전을 한 바 있다. 그의 작가로서 유럽 진출도 바로 부산의 유망한 작가 27명의 자료가 실린 이 책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젊은 지방작가 강태훈의 성공적인 유럽 데뷰와 작가 김 성연이 운영하는 예사롭지 않는 <반디>의 불빛은 지금까지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 잘되는 일에 흔히들 무난히도 써먹는 ‘운이 좋았다!’라고 하기에 그들의 과정은 그동안 미술현실에 자신의 역할을 떠벌이지 않고 소신있게 실천함으로서 보여주는, 적어도 기자의 눈에 일종의 침묵시위처럼 비쳐진 건 왜일까!

최근 몇 년 동안 부산 미술계가 벅차게 치러왔던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 속에 부산미술의 정체성이 다소 혼동스럽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서울에 와서 활동하는 부산 출신의 젊은 작가들 사이엔 요즘 ‘다시 부산에 내려가자!’라는 진한 농담이 유행인걸 보면 적어도 기자는 반디의 김성연 대표와 젊은 작가 강태훈의 이번 합작을 ‘부산 미술계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성과로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젊은 작가 강태훈이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아직도 부산 미술계에는 해결되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부산 미술계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인물은 부산미술계에서 지위가 높은 유지인사나 목청이 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주어진 역할에 소신있게 최선을 다하는 주변 미술인들임을 상기시킨다.

대안공간 <반디> 대표 김 성연과 강태훈의 이번 공동 작업은 이제까지 일부 지방의 기성작가들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위한 절대적 해법으로 믿어왔던 권력과 재력확보, 그에 따른 전문적인 로비스트로서의 변신 따위가 얼마나 소모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이 시대의 매체를 활용하고 결코 무리하지 않는 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기에 이 두 남자는 성공 강박증보다는 그 이면에 전개되는 진정성있는 과정과 새삼 ‘상식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자신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라. 이제 세계의 중심은 당신의 발과 발 사이에 있으니’... 라는 말처럼 그들은 글로컬리즘(glocalism)이란 쇼를 은근히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내 보따리 속의 수도꼭지

▲ 목욕탕을 개조한 대안공간 <반디>
ⓒ 김성연
기자가 지난 구정 즈음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던 이 젊은 작가를 만났을 때만 해도 1회 개인전에 이어 2회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작업실을 옮기며 자신의 작업 조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2~3년 안에 이루어질 그의 두 번째 전시는 서울이 될 것이라고 주위에서는 추측했다.

무엇보다 지방 작가에게 서울에서의 전시는 마치 결승전에 뛰어든 선수들처럼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대안공간의 네트워크등. 젊은 작가 발굴의 시스템이 이전에 비해 많이 유연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방 작가로서 소위 중앙에서의 작품 발표는 입시를 앞둔 수험생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작품을 계속하게 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게 하는 일종의 판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전시를 계획하는 지방의 작가들은 자신의 온 역량과 자본을 올인하는 도박사가 되기도 한다.

단순히 전시회에만 올인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의 정보력 부족이라는 일종의 자괴감적 자기반성의 연장선상에서 실기 박사과장 진학과 같은 재투자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청년작가 강태훈은 서울에서의 성공적인 작가 데뷰를 위한 밑 작업인 ‘인맥용 진학'이나 보다 '친근한 혹은 편리한 작가되기‘ 용도로서 작업실의 수도권 이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서울로 오라고 손짓하던 지인들에게 역으로 ’요즘은 남쪽으로 이동하는 게 추세‘라며 우스개 소리로 부산 홍보대사 역할을 하곤 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보란 듯이 그는 유럽의 한 갤러리에서 주목받으며 초대된다. 그 결과 전속 작가로 5년 계약과 함께 4월에 갤러리 개관 이전 전시와 10월에 개인전까지 스케줄이 잡혔다. 이번 강태훈의 쾰른 아트페어와 5월에 서울의 KIAF 그리고 6월의 비엔나 콜로니치 아트페어 출품도 바로 이 갤러리 프로그램의 연장선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강태훈의 수도꼭지엔 어떤 마력이 있는가? 1987년 작가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부산에서 열리던 전국체전 매스게임에 동원된 어린 강 태훈에게 -누군가에게는 잊혀져 갈 체험이-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 지기는 고사하고 편집증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생생하게 기억했다."군사정부의 통수권자가 온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고된 연습에서 허덕거려야 했어요. 몇 시간 연습 뒤 10분간 쉬는 시간을 맞으면 2천여 명의 학생들은 모두 수도꼭지를 향해 달려가 목을 축였죠." 그 날 이후 강 태훈에게 수도꼭지는 파시즘 체제 아래 억압받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피하게 해준 성배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었다.

이 젊은 작가를 기자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부터다. 그가 대학원 시절부터 해온 수도꼭지 작업이 그의 어린 시절 매스게임에 동원되었던 한 초등학생의 연습 중 무더위와 피로 그리고 갈증을 잠시나마 해소해 주던 그 이상의 성배와 같은 수도꼭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소름이 돋았었다. 그 이후에도 그의 아랑곳 않는 ‘남용된 사물에 수도 꼭지질(?)’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번 전시초대로 베를린으로 떠나던 날, 또 한 번 난 소름이 돋아왔다. 그를 보면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젊은 시절을 베를린의 예술학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들의 필름이 되감기 시작했다. 20년 전,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처음 독일에 포토폴리오를 가지고 갔을 때 독일교수들에게서 검열관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세계의 중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던 시절이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자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말 한마디로는 왠지 개운치가 않다. 덧붙이자면 처음 기자가 베를린으로 떠날 때는 냉전 체제의 시대라 알라스카를 경유해 23시간 동안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 베를린을 갔던 것처럼 486세대인 기자가 숙명적으로 치러야 했던 것들을 397세대인 이 후배 작가는 통쾌하게 단축의 코스로 관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되기 위한 관문으로 여기고 그 곳 예술 대학의 입시란에 경쟁률을 높이며 무거운 마패를 들고 연구실을 기웃거리던 외국 학생시절이 청년 강 태훈에게는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그는 예술가로 검증받기 위해 혹은 인정받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국제 미술계로부터) 작품을 인정받고 작가로서 초대되어 베를린으로 떠났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이 소름끼치게 나의 젊음까지 해소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나의 보따리 장사 경력 속에서 ‘보따리 속의 수도꼭지’ 같은 사건이 되고 만 사연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예술가가 되기 위해 2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향해 날아갈 때 전국체전 매스게임에 동원되었던 그 소년은 매스게임을 하던 바로 그 땅에서 국제적인 청년 예술가가 되어 이제 그 때의 수도꼭지를 유럽에 소통하고 수출한다.

현재 강태훈은 베를린의 갤러리 카프리스 혼의 개관 전에 참석중이다. 강 태훈외 이번 대안 공간 <반디>의 노력으로 해외에서 관심을 받게 된 박은생, 정윤선 같이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도 국제적인 미술 흐름 속에 지방 미술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강태훈#수도꼭지 작가#매스게임 소년#100% 지방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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