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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볼 것 많은 봄이라 그런지 짧게만 느껴집니다. 올 봄에는 꼭 만나고 싶은 꽃들의 목록을 적어놓고, 누군가 그 꽃을 만났다고 하면 발품을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못 하고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만 하는 꽃들이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없는 것이 삶이고 보면, 만나지 못한 꽃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도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햇살이 맑은 봄날,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올해 꼭 만나고 싶었던 한계령풀꽃, 한 주 지나면 또 내년을 기약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에 봄꽃축제를 여는 가리왕산으로 향했습니다.
강원도 정선,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을 바라보며 동강절벽에 화사하게 피어났던 동강할미꽃을 생각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을 부르며 가리왕산으로 향하는 길, 산마다 연록의 이파리와 산벚이 어우러져 봄 숲을 파스텔톤으로 물들여 갑니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저들의 품에 안겨 옹기종기 피어있을 들꽃들을 바라보는 그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니 발걸음이 흥겹습니다.
가리왕산, 올라가는 길가에 평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노랑제비꽃이 만발하고, 양지꽃과 큰개별꽃이 손님맞이를 합니다. 괭이눈도 지천으로 피어나 호기심어린 눈으로 방문객들을 바라봅니다.
"얘들아, 안녕!"
가리왕산의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에 연애편지 한 장 멋들어지게 써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추억 하나 갖지 못한 지난날들이 왠지 서글퍼집니다. 그 젊은 날에 사는 멋을 알았더라면 조금 유치할지도 모를 편지를 썼을지도 모를 텐데 생각하며 그들이 놓아버린 얇은 자작나무 껍질을 책갈피에 끼웠습니다.
얼레지꽃밭, 난생 처음 보는 화원입니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것이 이런 것 인가보다 했지요. 그 곳에는 얼레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들짝 피어난 꿩의바람꽃, 들바람꽃, 홀아비바람꽃, 쌍둥이바람꽃, 태백바람꽃, 한계령풀, 갈퀴현호색, 복수초, 달래, 큰개별꽃, 양지꽃, 금강제비꽃과 피어날 준비를 하는 삿갓나물, 연령초, 풀솜대, 족두리풀과 수많은 새싹들이 자기들이 피어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햇살까지도 맑은 날, 출사를 나가면 메모리카드를 꽉 채워오곤 했는데(150컷 정도) 너무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함이 미안해 마음에 담았더니 돌아오는 길 카메라에는 50여장의 사진만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우러진 들꽃들을 보면서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날엔 이렇게 좋은날엔 /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 아름다운 꽃송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은 한 송이도 없는데 어쩌면 모두들 그렇게 환한 얼굴로 하루를 맞이하고 있는지, 작은 바람에도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웠습니다.
세상사에 시달리며 팍팍해진 마음도 그들 앞에서면 부들부들해집니다. 바늘 하나도 안 들어갈 것 같았던 강퍅한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옥토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힘입니다. 작은 들꽃들이 내게 주는 선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고 한탄하며 살아가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그런 마음도 없이 내가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숨 가쁜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들꽃을 만나기 위해 걸었던 수많은 발품,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지만 그로 인해 내 삶을 진정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터벅터벅 홀로 걸었던 그 길들이 내 삶으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연록의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꽃편지를 배달하는 빨간 자전거가 달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