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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돼야 한다. 사진은 서울 세종로 정보통신부 '유비쿼터스 드림관'에 전시된 지능형로봇 '마루(MAHRU)'.
과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돼야 한다. 사진은 서울 세종로 정보통신부 '유비쿼터스 드림관'에 전시된 지능형로봇 '마루(MAHRU)'.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제작비 100억 원 들어가는 영화를 직접 만들면서도 손에 돈 몇 푼 못 쥐는, 말로만 듣던 그 '영화 스태프'이 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임권택이 영화 찍어도 돈줄이 없다는 얘기를 영화인에게서 직접 듣자니 그 위기감이 내게도 피부에 와 닿았다. 스크린쿼터라는 안전장치도 해제된 마당에 거장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흥행참패하리라는 것은 이미 당시 그 분에게는 예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인건비'를 기점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마 그 분으로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잠깐 얘기하면 고등과학원의 뛰어난 연구원들이 즉각 공식 하나 쓱쓱 써 주리라 예상하고 왔더니 2주가 웬 말이며 인건비는 또 뭐란 말인가.

연구직이 명예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자문료란 엔딩 크레딧 정도면 족했으리라 여겼을 법도 하다. 그러다보니 "모 기관에서 자문료로 시간당 30만원 받는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돈 욕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국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기관이라는 이곳에서 세금 떼고 딱 200만원 받는 우리에게는 분명 돈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 두어해 전에 증권가로 진출한 한 동료는 지금 나보다 세 배 가까이 월급을 받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무려 100억 원이라는 거액으로 공들여 찍는 영화에서 과학에 대한 자문료가 전혀 책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득 나는 오디오 애호가들이 스피커 케이블로 100만원이 훨씬 넘는 제품을 쓴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전체 스피커 시스템이 그 정도 액수밖에 안 되는 나 같은 처지에서 보자면 그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진정한 애호가들의 항변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1000만원짜리 스피커에 1만원짜리 케이블 쓸까?"

100억원 짜리 영화 찍으면서 조언자들 밥값 하나 책정하지 않았다는 말에 나는 천만 원짜리 스피커를 사두고 동네 전파상 가서 "쓰다만 막선 좀 얻을 수 없을까요"라며 기웃거리는 마니아를 떠올렸다.

'공식 나와라, 뚝딱'... 과학은 도깨비 방망이?

그런데, 인건비 문제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우리가 당혹스러웠던 점은 "뚝딱 공식 하나 써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분의 예상이었다. 사실 우리들로서는 이것이 돈 문제보다 훨씬 더 두터운 벽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과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의 심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심상은 언뜻 보기에 모순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 눈에 비친 과학은 한편으로는 지난 세기 성공적인 서양제국의 힘의 원천이었으며, 문명과 근대화의 원동력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종의 '도깨비 방망이'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중요하고 경외할만한 과학이 어이없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냉대 받는 천덕꾸러기이다. 아쉬울 때면 급하게 찾게 되는 도깨비 방망이지만 그 순간만 지나가면 돈 못버는 무능아가 아닌가.

나는 이 이중적이고 왜곡된 심상의 근원이 아직 과학이 온전히 체화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미성숙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이란 무슨 공식이나 단편적인 지식들의 총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 스스로 근대화와 계몽의 시대를 겪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하고 재발견하면서 체화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목소리 큰 사람이 어디서나 끝내는 이기게 되어 있다.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과학의 발전과 두 차례의 과학혁명은 서양인들의 인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 과학은 그저 복잡한 수식이나 법칙들로서만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이는 우리나라의 전문 과학자 집단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황우석보다 PD수첩이 과학적이었던 까닭

지난해 1월 황우석 박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연구원들에 둘러싸여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지난해 1월 황우석 박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연구원들에 둘러싸여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식을 다루거나 문제를 푸는 것은 어느 정도 따라가도 말과 이야기로 과학적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규칙과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인문학의 발전이 중요하고 또 인문학이 도약하기 위해서도 과학과의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의 엄격한 구분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지만, 이렇게 두 문화가 단절적인 나라는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과학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은 곧 말하기와 듣기와 쓰기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가장 성공적인 학문으로써의 과학의 방법론이 어떠한지 그 엄청난 성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가야 한다.

비전공자들이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고'는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 지식만을 강조한 나머지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은 가르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방법론만을 놓고 봤을 때 과학자였던 황우석보다 비과학자였던 PD수첩이 훨씬 더 과학적이었음을, 그런 희한한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대다수 국민들이 알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숫자와 기호로만 과학을 이해시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그놈의 '공식'에 일종의 경외감을 가짐과 동시에 전지적인 힘 또한 기대하고 있다. 이 자체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공식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학적 논의의 최종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점은 강조해 두고 싶다. 공식 자체는 말 그대로 기호에 불과하다.

영화 개봉까지 계속 걱정이 남을 것 같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과학교육이 제대로 되었다면, 그 영화관계자는 공식을 묻기보다 물리적 내용과 지식과 물리적 이야기를 물었을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다시 재구성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그리고 그것을 영화 만드는 분들이 이해하는 데에도 또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과학자들이 영화제작자들에게 과학 강의를 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그 자체가 영화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인 셈이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래저래 한국영화가 처한 상황이 어렵다는데, 스크린쿼터 같은 문제는 그 문제대로 대응하더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노력 또한 다각도로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싸구려 코믹 영화로만 언제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떠나는 그 분에게 나중에라도 우리보다 더 뛰어난 분들 모셔다가 영화 내용과 관련된 물리적 기본 내용을 강의 듣는 것이 결국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바쁜 촬영일정에 그 조언이 받아들여졌을까, 아니 100억짜리 영화 찍으면서 강의료가 없다고 그런 기회가 무산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영화 개봉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선샤인>은 지구가 죽어간다는 설정의 과학영화다.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선샤인>은 지구가 죽어간다는 설정의 과학영화다.

덧붙이는 글 | 이종필 기자는 '시민기자기획취재단' 입니다.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과학자#한국영화#제작비 100억#영화 스태프#자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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