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장로들의 얘기를 전해들은 마을사람들은 비교적 차분한 가운데 닥쳐올 싸움을 대비해 돌도끼와 돌창을 꺼내어 그것을 좀 더 날카롭게 가다듬고 화살촉을 만드는 한편 목책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행여 약해진 곳은 없는지를 두루 살폈다.
“아이고 추수도 끝났으니 이제 신나게 놀고먹나 했더니 이게 웬 변괴야.”
덕수는 돌을 갈아 날카로운 화살촉을 만들면서 연실 불평을 쏟아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추수가 끝난 다음에는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사를 성대히 올린 후 큰 잔치를 올리는 것이 두레마을의 전통이었고 그 와중에서 처녀총각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리게 되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 18세인 덕수는 그런 즐거운 축제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 정체모를 적에 대해 불만이 쌓여만 갔다.
“어떤 놈들인지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이걸로 확!”
날카롭게 갈아놓은 돌화살촉을 덕수가 함부로 휘두르자 옆에서 나무를 쪼개던 호태가 슬쩍 뒤로 몸을 젖히며 주의를 주었다.
“야 이놈아! 그 놈들 잡기 전에 나부터 잡겠다!”
덕수와 호태의 옆으로 울긋불긋 색을 들인 옷을 입은 유란이 흰자위가 많은 눈을 희번뜩인 채 휘영휘영 지나갔다. 덕수와 호태는 고개를 숙인 채 유란을 곁 눈길로 슬쩍 훔쳐본 다음 싱글거렸다.
“우리 유란님은 어째 저렇게 늙지도 않누. 나이가 이제 서른다섯이 아닌가?”
“신기가 제대로 들어서 그런 거야. 저렇게 늙지도 않지만 대신 혼인도 못하잖아.”
유란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은근히 쑥덕거리는 사람들의 입방아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덕수가 유란의 뒷모습을 보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시집도 못 가는 유란아. 이리 와서......”
그 순간 유란이 매서운 눈초리로 획 돌아보자 덕수는 물론 옆에 있던 호태까지 뜨끔하여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란은 그런 덕수와 호태가 한심하다는 듯 입 꼬리를 살짝 들어 보였다가 자기 갈 길을 가 버렸다.
“야 이놈아. 그러다가 너 부정 탄다.”
호태의 주의가 떨어지기 무섭게 덕수는 갈아놓은 돌화살촉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마을의 가장 넓은 곳에서는 장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의 장정들이 활을 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두레마을은 해마다 추수가 끝나곤 하면 사냥을 했기 때문에 장정들의 활솜씨는 그리 뒤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결코 뛰어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장을 갖추고 덤벼드는 사람을 상대로 활을 쏘는 건 그들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내가 소리를 치면 일제히 쏴야 한다. 사냥과는 달리 몰래 접근하여 쏘는 게 아니라 방패를 들고 몸을 피하기도 하는 사람을 쏘는 것이다.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피할 틈을 주지 않고 모두 함께 쏘아야 한다.”
하달 역시 제대로 된 싸움을 겪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무리지어 다가오는 땋은 머리 족속을 향해 무기력한 저항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나무와 바위 뒤에 숨어서 두세 명이 무리지어 날리는 화살은 싸움에 익숙한 땋은 머리 족속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땋은 머리 족속은 큰 나무방패를 앞세워 전진한 다음 묵직한 돌도끼를 휘둘러 상대를 제압했다. 행여 완강한 저항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번쩍이는 무기를 든 자들이 뛰어 들어와 그것을 휘둘러 대었는데 한번 베이면 사람의 살이 나뭇잎처럼 갈라져 나갔다.
후에 하달은 여러 돌을 골라 날카롭게 갈아서 짐승의 살점을 시험 삼아 베어 보았지만 그와 같은 효과는 보지 못했다. 그나마 흑요석이 그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두레마을 인근에서는 흔하지 않은데다가 잘 못 쓰면 너무 쉽게 이가 나가는 단점이 있었다.
‘저들의 무서운 무기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목책위에서 내려다보며 화살을 날리는 방법뿐이다.’
하달의 옆으로 울긋불긋한 옷을 치렁대며 유란이 천천히 다가오자 장정들은 일순간 활에서 손을 떼고 길게 열을 맞추어 섰다. 유란의 손에는 가끔씩 날개를 퍼덕이는 닭 한마리가 목이 잡힌 채 들려 있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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