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여인들은 끌려갔지."
장로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날의 비극은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마을 주위에 이중으로 목책을 올렸고 매년 이를 손보았네. 하지만 그런 대비를 왜 하는 지를 지금 있는 마을의 젊은이들은 잘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네. 그런데 하필 이번에 온 놈들이 삼십 년 전 그놈들일 건 무엇인가."
"그 놈이 땋은 머리를 하고 있더이까?"
장로들 중 하나가 하달에게 묻자 하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리와 같은 복색과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네."
"그런데 어떻게 아시었소?"
"그 자가 내 이름을 사칭하여 불렀네."
장로들은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족장의 이름은 멀리까지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너무 속단하는 게 아닙니까?"
"아닐세. 그 번쩍이는 무기를 쓰던 땋은 머리 부족이 돌아온 걸세. 난 그 청년의 눈빛을 보고 그것을 알게 되었네."
좀처럼 뜬금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 하달인지라 장로들은 그 말에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 녀석의 눈빛은 소여를 꼭 빼다 닮았어."
그 말에 마악만이 푹 고개를 숙였고 나머지 8명의 족장들은 소야가 누구였는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하달이 차분하게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옛 일을 얘기해주었다.
"소여는 삼십 년 전 임신한 몸으로 끌려간 내 아내라네. 그 녀석에게 부모의 이름을 묻자 내 이름을 대었어. 소여와 꼭 닮은 애가 불현듯 나타나 내 이름을 대었다면 그것이 뭘 뜻하겠나? 땋은 머리 족속이 그 애를 시켜 우리를 염탐하게 한 것일세. 마을의 방비태세와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를 세어보게 한 것이지."
삼십 년 전의 일이 일어난 직후, 먹을 것은 모조리 강탈당하고 일할 수 있는 장정은 대부분 살육당한 두레마을은 더이상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남은 사람들을 다독인 이는 하달이었다. 그 역시 임신한 아내가 끌려가고 겨울을 날 양식이 없어 어린 아들을 굶겨 죽여야 할 상황이었으나 결코 굴하지 않았다.
두 해가 채 되기 전에 짓밟힌 가옥과 농토를 모두 복구한 하달은 십 년에 걸쳐 마을 주변을 두 겹의 목책으로 둘러싸고 긴 도랑으로 감싸는 대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올지 모르는 땋은 머리 족속들의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두레마을은 점점 더 부유해져 먼 마을에서 두레마을과 거래를 하기 위해 찾아오다가 아예 두레마을에 정착을 한 이들도 있게 되었다. 타지에서 온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있으면 하달은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무마했고 그로 인해 두레마을의 인구는 더욱 불어났으며 더불어 부유해졌다.
"이번에 땋은 머리 족속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결코 녹록하게 대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싸움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네."
하달의 말은 불을 지피러 온 하달의 딸 유란이 들어오자 잠시 끊어졌다. 유란은 그을음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잘 구워 놓은 나무를 쌓아놓고 익숙한 솜씨로 부싯돌로 불을 붙인 후 말없이 움막에서 나갔다. 하달은 유란이 나가자 얕은 한숨을 내뱉은 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아이만 해도 그날 이후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충격이 크네. 여기 있는 이들도 희미하지만 어린 날의 나쁜 기억을 가지고 두려움만을 지니게 된다면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가 없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 저희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입니다."
장로들 중 하나가 크게 소리치자 다른 장로들도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어떤 흉계를 가지고 왔는지는 몰라도 매년 목책을 정비하고 도랑을 깊게 파온 이상 감히 마을을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추수도 끝났으니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무기를 정돈하면 내일이라도 저들에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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