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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와 그 가족'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평소 사람 냄새가 나는 훈훈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의 폭을 넓게 가져오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러기 아빠'의 사연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껄끄럽고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이유는 '먹고 살기도 빠듯한 처지에서 언감생심 자녀들의 유학은 꿈도 못 꾸는 서민들을 도외시하고 가진 자들의 우쭐함에 편승하여 위화감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망정 어린 자녀들을 외국에서 공부시키느라 부부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기러기 가족'들의 고충은 방송 내용처럼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4, 5년도 족히 가족 간에 떨어져 지내는 일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한국에 혼자 남아 돈을 벌어야 하는 가장의 외로움이나,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사춘기 자녀들을 남편의 부재 속에 돌봐야 하는 아내들의 버거움의 무게란 어슷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15년 남짓한 호주 이민생활 중에 오고 가는 기러기 가족들을 여럿 보아오면서 그들 나름의 눈물겨운 사연 또한 얼마나 많을지 짐작해 볼 때가 있다.

미국의 부유층 기러기 엄마들의 과소비 행태가 이따금 한국 언론에서 질타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호주의 기러기 엄마들 대부분은 낭비 없이 알뜰하게 생활을 꾸려 나가며 개중에는 무섭도록 야무진 부류들도 있다.

한국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한 푼 헛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식들이 필요한 것 외에 자신을 위해서는 되도록 아끼며 묵묵히 뒷바라지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떨어져서 이 고생이니 어미 된 자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첫째도 아이들이요, 둘째도 아이들뿐이라는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지게 되는 모양이다.

1년에 한두 번 방학 기간에 잠깐 한국을 다녀오는 것을 빼면 기러기 엄마들의 일상은 아이들 학교와 집, 학원이나 예체능 교습소로 다람쥐 쳇바퀴를 돌며 그날이 그날 같은 생활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면 외국 생활이래 봤자 같은 유학생 부모들이나 몇몇 이민자 가정과의 단순한 교류 외에는 이렇다할 일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들 뒷바라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들

언젠가 이웃에 사는 기러기 엄마에게 아이들 뒷바라지가 아무리 우선이라지만 낮에 한두 시간을 내어서 영어라도 배우면 좋지 않겠느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돌아온 대답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영어라면 더럭 겁부터 나서 시작할 엄두가 안날 뿐더러, 이 나이에 뭘 새롭게 배워볼 여력과 정성이 있다면 그마저도 자식들에게 쏟아붓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이뿐 아니라 호주에서 만나는 기러기 엄마들의 생각은 어슷비슷하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자식에 대한 한국 부모들의 지극 정성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이따금 들 때가 있다.

애들 학교 보내면서 자기 또한 공부를 한답시고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했다가는 밥도 제대로 못 해 주게 생긴 데다 영어를 못해서 받는 스트레스를 공연히 애들한테 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하는 '만년 대기조'가 되기를 기꺼이 원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돈을 들여야만 영어를 배우거나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호주에는 종교 단체를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좌나 클럽 활동이 수도 없이 많다. 잘만 활용하면 아이들을 유학시키는 동안 자신들의 외국 생활도 얼마든지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한들 이도 저도 싫고 아이들을 원하는 상급학교에 들여보낸 후 자신은 한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기러기 엄마들도 미처 지나치지 못하는 복병이 한가지 있다.

대학생이 되면 혼자서 밥을 끓여 먹을 수 있을 테니 자취를 하게 하거나 아니면 호주 가정에 하숙을 시키겠다는 '야무진 꿈'이 경우에 따라서는 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취생활이야 죽을 끓이든 밥을 끓이든 제가 알아서 할 바지만, 만약 호주 사람 집에 하숙을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학생들에 대한 호주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한 마디로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그 이유로 결국 쫓겨나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호주에서 생활하는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자고 난 후 침대 정돈이나 책상 정리, 옷가지 개기, 욕실 사용 후 뒤처리 등 주변정리 습관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어질러도 뒤치다꺼리는 당연히 엄마의 몫이며, 그저 공부만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응석받이들이 호주 가정에 간다고 해서 갑자기 자기 주변을 척척 정리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몇 년씩 남편과 떨어져 고생하고 있는 기러기 엄마들을 탓할 마음은 전혀 아니지만 기왕이면 좀 더 용기 있고 적극적으로 외국 경험을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자신의 발전과 아이들의 독립적인 미래를 위해 시야를 좀 넓혔으면 하는 주제넘은 조언과 함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코리안 닷넷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러기#조기 유학#호주#한국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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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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