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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락의 <녹파잡기>
한재락의 <녹파잡기> ⓒ 김영사
"죽엽은 용모가 빼어나고 풍만하며 풍류가 무르녹았다. 얘기를 나눌 때는 호방한 선비 같고, 노래는 이 시대 첫 손가락에 꼽힌다."

"현옥은 눈매가 환하고 눈동자가 반짝인다. 여러 잡기를 두루 섭렵했고 노래도 정묘하게 터득했으며, 자태가 민첩하고 성품이 온화하다."

<녹파잡기>는 조선시대 개성 한량 한재락이 만난 기생들에 대한 소회이다. '녹파(綠波)'의 연원은 정지상의 시 <송인>의 구절에서 비롯하나 이 책에서는 '평양'을 가리킨다. 즉 '녹파잡기'란 평양 기생들의 삶의 현장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어느 정도 알려진 '죽향'이란 이름도 보인다. 지은이는 '죽향'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녀가 그린 대나무를 보았는데 정취가 있었다" 하고, "붉은 치마와 옥색 저고리를 차려입은 모습이 하늘하늘하였다" 하고, "손님을 보자 안장에서 재빨리 내려서는데, 어여쁘고 젊은 모습이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죽향의 한시가 함께 실려 있다. 엮은이의 배려다. <늦봄에 구정도인 언니에게>라는 시를 보자. "병에서 일어나 봄 이미 저문 걸 몰랐는데/작은 창 앞에 복사꽃도 다 떨어졌네."

지은이 나름의 인물 묘사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 표현이 보드랍고 정감에 넘친다. 거친 구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인물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인물에 대한 경박한 접근이 아니라 미적 조우이거나 경건한 조우이다. '취란'과 '명주'라는 기생의 묘사를 확인해 보라.

손가락은 가는 파를 깎아놓은 듯하다. 몸집은 입은 옷도 못 이길 듯 가냘프다. 성품이 담담하여 물욕이 없다. (중략) 어떤 이가 혹시 이익으로 유혹하여도 그녀는 어김없이 완곡한 말로 물리치니 천성이 그런 것 같다.(123쪽)

노래가 청아하여 들보의 먼지가 날릴 정도이고, 춤은 민첩하여 숲속의 제비 같다. (중략) 그녀를 불러 철금(鐵琴)을 연주하게 한 적이 있다. 가는 손가락에서 향기가 피어오르고, '팅' 하고 줄을 튕길 때마다 구슬 같은 물방울이 바위 계곡에 날려 흩어지는 것 같았다.(120쪽)

용모나 기예를 묘사하는 것이 주된 것 같지만 실상은 내면이나 인품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영희'는 "노래와 춤을 잘하면서도 할 줄 모르는 듯이 감춘다"거나 '현옥'은 "부자든 초라한 사람이든 한결같이 친하게 사귀었다"거나 하는 말을 한다. 또 '차앵'은 "자신의 일상생활은 소박하지만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정성을 다해 베풀었다"는 얘기를 한다. '패옥'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녀의 수양어미가 편벽되고 괴팍한데다 탐욕스럽고 모질어서 하루도 그녀를 야단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굽혀 그 뜻을 받들었지만 끝내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머리장식과 화장도구를 모두 빼앗기고 홀홀단신으로 돌아갈 곳도 없었다. (중략)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간혹 수양어미를 헐뜯기라도 하면 그녀는 어미를 위해 변명하며 끝까지 원망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112쪽)

무엇보다 기생들의 삶의 애환을 생생히 접할 수 있게 하는 점이 이 책의 소중함이다. '희임'처럼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 사는 이도 있고, 기방을 나와 '초염'처럼 가난한 집의 아내가 되는 이가 있다. '경패'처럼 관찰사의 애첩이 되는 이도 있고, '명애'처럼 기적에서 빠져 양민이 되자 죽을 때까지 시골집에 은거하며 살겠다는 이도 있다. '나섬'처럼 몇 년 새에 물러나 있는 기생, '향임'처럼 몸져누워 있는 기생, '취련'처럼 노기가 되어 목로주점에서 술을 파는 기생도 있다.

나무람을 듣는 기생은 '삼앵' 한 사람뿐이다. "고운 얼굴이 활짝 피었는데, 마음가짐이 교만하고 방자하다. 함부로 농담을 하며 제멋대로 사람을 놀리는 것이 부잣집 도련님 같다"라고 못마땅해 한다.

권2에서는 기방 주변의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 풍류가도 있고 재주가 출중하거나 남다른 이도 있다. 이 가운데 '군할'과 '최염아'는 각별히 소리 흉내를 잘 내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왜 이런 이른바 '잡기'를 썼을까? 굳이 써야만 했던 본의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 대상이 꼭 기생이라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기록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놀라운 사실은 별 것 아닌 이 기록이 당시 기생들의 삶을 꼼꼼히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적 기록이 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한재락 / 옮긴이: 이가원ㆍ허경진 / 펴낸날: 2007년 3월 26일 / 펴낸곳: 김영사 / 책값: 1만1000원


녹파잡기 - 조선 문화예술계 최고의 스타, 평양 기생 66명을 인터뷰하다

한재락 지음, 안대회 옮김, 신위 비평, 휴머니스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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