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마을마다 구경하러 다니다 보면 뜻밖에 좋은 얘깃거리를 만날 때가 더러 있어요. 지난 6일, 경북 구미시 해평면에서 '북애고택'과 '쌍암고택'을 본 것도 우리 부부한테는 참 기쁜 일이었지요. 멋진 사진도 찍으며 그 마을에 얽힌 이야기도 듣고, 시골 사람들을 만나 사람냄새 나는 살가움도 넉넉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같은 날, 해평리를 벗어나 선산 쪽으로 가다가 길가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덮어놓고 들어갔던 '송당 마을(경북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에서도 아주 뜻 깊은 얘깃거리를 만났어요.들머리에서 바라보니, 몇 채 안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위에 옛 집이 두어 채 있는데, 그곳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풍경을 찍으려고 들어갔어요.
터를 넓히는지 굴착기가 한창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고, 서너 사람이 멀리 서서 이상한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우리를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마을에는 낙동강이 왼쪽으로 흐르고 그 곁 낮은 언덕 위에 아주 오래된 정자가 있어요. 널따란 잔디밭에는 소나무가 멋진 모습을 뽐내며 여러 그루 있고, 커다란 빗돌이 우뚝 솟아 있었어요.
여기가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는데, 자리는 참으로 멋진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사진기를 꺼내들었지요.사진을 몇 장 찍으면서 가까이 다가가니, 웬 날벌레가 그렇게 많은지…. 숨을 쉬면 코나 입으로 마구 들어와 못살게 굴었어요. 그런데 정자를 봐도 왠지 허름하고 낡아 보이는데, 틀림없이 어떤 역사가 있는 곳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어디를 봐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를 알만 한 안내판이 하나도 없는 게 참 이상했어요.
정자만 덩그렇게 두 채가 있고 그 앞에 한문으로 깨알같이 쓴 '신도비'만 있을 뿐이에요.옛 문화재는 왜 한문글자 투성이 일까?
아, 그런데 '우리 옛것'을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건 참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데 우리를 아주 힘들게 하는 게 하나 있어요. 다름 아닌 한문으로 쓴 현판이나 깨알같이 한자로 쓴 신도비.이런 것들을 보면 그만 가슴이 답답해져요. 비록 우리가 한자를 잘 모르는 무지렁이라 하더라도 이게 무엇인지,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알려면 억지로라도 읽어봐야 하는데 눈으로 떠듬거리며 읽다가 이내 그만두고 말지요.
몇 자 읽지도 못하고 그만 막혀버리니까요.'옛것'이고 벌써 몇백 년도 더 앞서 만든 것이니 그 시대를 생각하면 한문글자로 씌어 있는 게 마땅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말'로 쓴 안내판 하나쯤은 있을 만도 한데 아무것도 없을 땐 그저 아득하기만 하죠. 수박 겉핥기로 대충 눈으로 읽다가 이내 그만두는데, 이럴 때는 먼저 사진을 찍어 두고 나중에 집에서 그 뜻을 찾아보곤 해요. 남편과 이런 곳에 올 때마다 자주 했던 이야기인데, 이날도 둘이 신도비를 보면서 이야기 했어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이런 걸 볼 때, 이걸 다 읽고 뜻을 모두 알고 갈까?""아마 우리처럼 눈으로만 대충 훑어보고 그다지 마음에 두지도 않을 걸?""아니면, '이런 데는 한글로 쓴 안내판 하나쯤은 있으면 좋잖아?' 하고 가겠지. 그나마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뜻이야 찾아서 보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어려운 '신도비'를 읽다가 말고 둘레 모습을 찍기에 바빴어요. 한참 동안 둘이서 사진기 하나씩 들고 그러고 있는데, 언덕 아래에서 웬 어르신 한 분이 올라오셔요. 지나가다가 마을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들어왔다고 하니 무척 놀라시더군요.
"아, 그래? 그렇담 이왕 예까지 왔으니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한문글자로 씌어 있는 신도비를 읽지 못해 답답했는데 어르신께서 손수 알려주신다고 하니 퍽 기쁘고 고마웠어요. 명함을 건네 드리면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얘기하고 뜻밖에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지요.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나라에서 정자까지 세워주었나
어르신 얘기를 들으면서 알았는데, 바로 이곳은 조선 성종 임금 때 무신이었고, 여러 벼슬을 지낸 송당 박영 선생의 어질고 높은 뜻을 기려 나라에서 만들어 준 정자라고 했어요. 양녕대군의 외손자이기도 한 박영 선생은 벼슬을 그만두고 선조들이 살던 경북 선산으로 돌아와 이곳 낙동강 가에 있는 송당 마을에서 신당 정붕 선생께 대학을 배우고 의술을 익힌 곳이래요.
선생은 마을에 훌륭한 의원이 없어 소중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고, 의원이 있어도 가난한 백성들은 부모한테 약 한 첩 제대로 못쓰고 죽어 가는 걸 매우 불쌍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손수 의술을 배워 가난한 사람들한테 많이 베풀었다고 해요.이렇게 훌륭한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나라에서 정자를 만들어 주었고,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까지 세워 주었다고 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렇게 어질고 훌륭한 분이라면 나라에서 멋진 정자를 세워 줄만도 하겠구나 싶었어요. 또 이 얘기를 들려준 박기후(81) 어르신은 박영 선생의 18대 종손인데, 성균관 전의를 지내기도 하셨대요. 낯선 나그네가 자기 선조의 얼이 담긴 곳을 여기저기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올라오셨구나 생각했어요.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왠지 허름하고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아 어르신께 여쭈었어요.
"그런데 어르신, 이렇게 훌륭한 곳인데 좀 더 관리가 잘되면 좋겠네요.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요."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했더니, 어르신이 겸연쩍어하시면서 "그래도 관리를 한다고 하긴 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셨어요.이런저런 얘기를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듣고 난 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려고 하니 어르신이 우리를 붙잡으세요. "우리 집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합시다" 하시면서 언덕 아래에 있는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세요.
우리는 손사래를 치며 다른 곳에도 가 봐야 하기 때문에 얼른 가야 한다고 얘기를 해도 어르신은 우리의 옷소매를 잡아 이끄세요.
"예까지 일부러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찾아온 손님한테 예의가 아니여!"
억지로라도 데리고 가서 차 한 잔이라도 먹여서 보내려는 어르신 마음이 무척 고마웠지만, 갈 길도 멀고 길을 몰라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거듭 고맙다는 말씀만 드리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여기 이야기를 써서 글과 사진을 들고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인사도 했어요. 또 그땐 반드시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가겠노라고 약속했지요.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살필 줄 아는 박영 선생의 후손답게, 살갑고 넉넉한 마음이 가득한 어르신이었어요.
"어르신! 가까운 날에 꼭 다시 찾아뵐게요."
이런 뜻 깊은 곳이 문화재로 관리되어야 할 텐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박영 선생을 더욱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자료를 뒤지던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뜻이 담긴 곳이 하다못해 지방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만약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면 훌륭한 박영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웠을 거고, 날벌레가 그렇게 윙윙거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뜻 깊은 얘깃거리를 만났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아마 그냥 지나쳤다면 끝내 '박영 선생'이 어떤 분인지조차 몰랐을 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씩 자기 마을 둘레를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름난 곳에 찾아가려고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사는 언저리에 이런 멋진 곳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답니다. 아 참, 지난 기사에서 박영 선생이 '냉산문답'으로 이름난 분이라고 얘기했지요? 이 이야기도 박영 선생의 자료를 찾다가 안 이야기인데 이건 따로 묶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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