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콩먀오로 간다. 호텔을 나서 일행을 뒤쫓아 갔다. 취에리(阕里)라고 쓰여있는 팡(坊)을 지나면서부터 공예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벌써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취에(阕)라는 말이 대궐문이란 뜻이니 공자를 황제의 반열에서 취급하는 느낌이다.
콩먀오는 중국의 3대 궁전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남북으로 뻗은 길이가 1㎞가 넘고 행랑채가 400칸이 넘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콩먀오 안에는 세 개의 디엔(三殿), 한 개의 꺼(一阁)와 탄(一坛), 세 개의 쓰(三祠), 두 개의 우(两庑), 탕(两堂), 짜이(两斋)가 있고, 열일곱 개의 팅(十七亭), 오십네 개의 먼팡(五十四门坊), 그리고 앞뒤로 모두 아홉 개의 팅위엔(庭院)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건물마다 각각 기능과 규모가 다르지만 모두 공자의 사상과 문화와 관련된 것이다.
처음 보는 이에게 은은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글자가 쓰인 여러 문들을 지나고 또 지나 씽탄(杏坛)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콩먀오의 본 건물인 따청디엔(大成殿)에 이른다. 궁전의 폭이 45.78미터이고 깊이가 24.89미터,높이가 24.8미터이며 면적이 1836평방미터가 되는 거대한 궁전건축물이다. 베이징 꾸궁(故宫)의 타이화디엔(太和殿)과 비슷하고 견줄 만하다.
따청디엔 바로 앞에 열 개의 돌기둥마다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을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구슬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를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얼롱씨쭈(二龙戏珠)라 부른다. 하늘을 찌를 만한 기세다.
궁전 안에는 높이가 3.3미터에 이르는 공자의 조각상이 있다. 권 대표가 공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해서 봤더니 정말 호나우딩요처럼 앞 이 두 개가 돌출된 모습이다.
크고 둥근 눈에 넓은 코에 튀어나온 이, 그렇지 미남형은 아니지만 양손을 모으고 예를 갖춘 모습이야말로 정녕 유교를 말해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양 옆에는 안회(颜回), 증참(曾参), 공급(孔及), 맹가(孟轲)의 동상이 약간 작은 크기로 보좌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각 건물의 비사 또는 정사를 다 보고 배우려면 며칠이 가도 못할 것 같다. 권 대표와 일행을 따라 귀동냥과 눈요기로 약간의 허기를 속일 뿐이라 안타깝다. 다음에 공자와 맹자 기획취재를 만들어 꼭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다.
콩먀오를 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에 있는 한식당에서 찌개와 해물전을 시켰다.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점심을 먹고 종업원이 타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태산에서 나를 봤다는 것이다. 정신 없이 산을 오르는 것이 특이해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취푸에 오는 사람들이 태산을 거쳐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 카메라의 사진을 노트북에 옮기느라 다소 시간을 지체했더니 일행이 이미 떠난 상태였다. 콩푸로 갔을 테니 가다 보면 따라잡겠지. 어짜피 권 대표의 재미난 설명을 듣노라 그렇게 빨리 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콩푸는 콩먀오의 서편에 있는데 공자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보통 푸(府)라 하면 행정기관과 주거공간이 복합된 곳이라 생각된다. 공자의 위상을 고려해 콩푸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공자의 후대 사람들을 이르러 옌셩꽁(衍圣公)이라 한다. 성현의 반열에 오른 공자의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콩푸에는 옌셩꽁들의 삶과 가족문화가 잘 보존돼 있는 셈이다. 팅(厅), 탕(堂), 루(楼), 씨엔(轩) 등 각종 건축물들이 463칸이나 되는 거대한 집이다.
가운데 본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묘가 있고 서쪽으로는 공부방인 학원으로 구성돼 있다. 본채는 앞쪽으로 업무를 보던 관아가 있고 뒤쪽으로 주택이다. 공씨 집안은 대대로 이어 내려와 현재 76대 후손에 이르렀다. 76대 옌셩꽁은 대만에 있는 콩더청(孔德成)이라 한다.
왜 대만에 있는가. 아마도 쟝제스와 결혼한 쏭메이링의 언니인 쏭아이링(宋霭龄)과 공자의 75대손이라 알려진 꽁썅씨(孔祥熙)와 결혼했고 그는 쟝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재정을 맡았기에 후에 일가가 대만으로 이주한 것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된다.
공교롭게도 꽁샹씨는 중국공산당과 대만국민당 정부 모두에게 배척 받는 비운의 옌셩꽁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운이라기 보다 예와 도덕을 중시하는 공자의 사상이 그렇게 현실 정치에 참여지향적이었는지, 아니면 꽁샹씨 개인의 사욕이었는지 또는 당시 현실이 그를 쟝제스 국민당 정부의 2인자로 자리매김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여간 콩푸에는 공자 후손들의 가계도가 있고 공자 일생을 벽화로 구현돼 있기도 하다.
콩푸를 나오니 다른 일행들은 호텔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는 혼자 떨어져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는 콩린까지 걸었다. 콩린은 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공자묘가 있는 무덤이니 굳이 설명이 없어도 되고 오히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길거리 모습이 편해 보인다. 길을 오가는 마차들과 자전거들이 색다르다.
쯔셩린(至圣林)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다. 문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공예품 거리가 형성돼 있다. 대체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예품들이 대부분인데 공자 얼굴이 있고 '친구가 멀리서 오면 그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远方来不亦乐乎)라고 쓰여 있는 가방은 처음 보는 것이라 재미있다.
오른쪽으로는 주로 도장 파주는 가게다. 취재도 할 겸해서 아들 이름으로 5위엔을 주고 돌도장 하나를 팠다. 하도 비싼 도장을 권유하길래 그럼 하나 더 파라고 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적어주고 10위엔 내고 나올 때 찾아가겠다고 했다. 주로 관광지에 있는 중국 상인들은 참 욕심쟁이다.
하나를 사면 꼭 하나 더 사라고 더 비싼 걸 권한다. 싫다고 해도 하여간 끝까지 말을 건다. 귀찮을 정도로. 주로 이거보다 이게 더 좋으니 사서 가면 좋을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손님이 안 살 것 같으면 옆에서 지켜보던 상인이 또 말을 건다. 이건 어떠냐.
콩린 안으로 들어서니 또 귀찮은 일이 생겼다. 한 아주머니가 자기가 이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주겠다고 한다. 일종의 아르바이트 다오여우(导游)인 것이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계속 따라온다.
쭈쉐이챠오(洙水桥)에 이르니 두 어살 된 꼬마가 할머니랑 놀고 있다. 나도 같이 놀면서 사진도 찍었는데 거기까지 와서는 할머니랑 아는 사이인지 이런저런 말을 건네더니 또다시 5위엔이면 된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콩린은 중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된 씨족 묘장 군이라 할 만하다. 공자묘 뿐 아니라 공씨 집안의 가족묘도 있고 유명 서예가들의 비석도 많다. 쭈쉐이챠오 조금 지나면 씨앙디엔(享殿)이 나오는데 공자보다 먼저 죽은 그의 아들 백위(伯鱼) 공리(孔鲤)와 공리의 아들 자사(子思) 공급(孔及)의 묘가 있고 그 뒤에 바로 공자묘가 있다.
공자는 66세의 아버지와 20세가 채 안 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479년까지 살았으니 장수했다. 그저 아담한 무덤의 형상을 했지만 그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특히 자공(子贡)이 직접 심었다 하는 나무는 웅장하고 거대하다. 말은 그렇지만 기원전에 심은 나무일 리는 없다.
공자묘 앞에 서니 2500년 전 뛰어난 사상가의 발자취가 사뭇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진시황과 문화혁명의 침공에도 아랑곳 없이 굳건하게 오늘에 이른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와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인간을 생각하는 지혜와 학문이야 변할 리가 있겠는가. 종교지도자가 아니면서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보다 더 존경 받고 추앙 받는 이가 어디 또 있을까. 아마 그래서 더욱 공자가 돋보이는 지 모르겠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씻고 조용히 저녁시간을 기다렸다. 호텔에서 추천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취푸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친구가 길을 안내해 준다. 너무 고맙다.
넓은 야외 공연장에서 막이 오른 행단성몽(杏坛圣梦). 취푸 시가 의욕적으로 기획 제작한 이 공연은 정말 볼 만하다. 공자의 일생과 사상을 주제로 50여명의 배우들이 출연하고 마차를 비롯해 각종 소품들이 다채롭기도 하거니와 음악과 무용, 무술과 연기가 마치 살아있는 종합예술을 본 느낌이다. 중간에 한국무용이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기도 하다. 하여간 너무 훌륭하다. 오죽하면 이 공연을 한국에서 해도 성공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공연을 보고 택시를 타고 구루 근처의 야시장에 들렀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공연을 봤기에 취재도 할 겸 찾았다. 크지 않은 시장이지만 사람들이 많다. 양고기 구이에 맥주를 마시는데 앞자리에 있는 여자아이가 귀엽게 웃는다.
귀여워했더니 나중에 자기 아빠 담배를 가져와서 건네준다. 마침 준비해간 선물을 가져가지 않아서 지갑에서 한국 돈 천원 지폐를 꺼내줬다. 기념으로 가지라 했더니 좋아한다. 그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네 자리로 오라고 한다. 같이 생맥주를 엄청 마셨다.
조금 있으니 또 옆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이 술잔을 권한다. 바이져우(白酒)를 권하기도 한다. 이거 이러다간 큰일이다 싶었다. 너무 취하면 내일 일정도 있고 해서 술자리를 마치려는데 그게 쉽지 않아 결국 11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끝났다. 참 즐겁게 마신 술자리이다. 이렇게 취푸에는 격의 없이 대해주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취푸의 밤이 깊어가고 하늘에는 아직 덜 둥근 달이 떴다. 하루 종일 공자와 대화했고 예상하지 못한 깊은 맛의 공연도 봤으며 야시장의 느긋하고 이국적인 취기로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blog.daum.net/youyue/1039077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