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교육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이나 공교육의 질적 저하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표면적 원인 못지않게 저변에 깔려 있는 심층적 원인 역시 함께 규명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심층 원인을 규명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한국 교육의 저변에 깔려 있는 역사적·문화적 코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의 권위가 점점 떨어지고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가 저하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학교의 대중 흡인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국 학교의 대중 흡인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의 학교 문화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양상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초·중등학교의 문화를 보여 주는 구체적 양상들로서 정규 수업 외에도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각종 단체행사를 들 수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흥겹고 즐거운 행사가 될 수 있으나, 근대 초기에 이런 학교행사를 고안한 사람들은 단지 흥겨움과 즐거움을 줄 의도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위의 행사들로 대표되는 문화를 통해 그들은 처음 한동안은 실제적 효과를 보았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더 이상은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교사나 학교교육의 권위가 추락하는 원인 중 한 가지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단체행사를 고안한 사람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 그 해답은 메이지(1868~1911년) 시기의 일본 학교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978년에 일본 역사학자인 다카하시 사토시가 저술하고 미라이사(社)가 발행한 <일본 민중교육사 연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다카하시는 현재의 시즈오카현 이와타군 후쿠다마치의 도요하마 소학교의 <교무일지>를 바탕으로 메이지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근대 교육이 정착했는지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학교에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단체 행사가 정착된 과정과 그 배후의 의도를 규명하려 했다.
도요하마 소학교의 <교무일지>에서 운동회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때는 1887년 1월 17일이다. 바닷가에서 열린 운동회에서 학생들은 깃발 뺏기, 투구 경쟁 등의 전투적 놀이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8년부터는 운동회가 정식으로 학교 행사가 되었다. 이 시기의 조선은 갑신정변(1884년) 이후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청·일 양국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30년(1897)이 되면, 학교 행사가 한층 더 제도화되어 시업식, 졸업증서 수여식, 입학식 등의 다양한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다.
또 메이지 30년대(1897~1906년)에는 종래의 운동회에서 소풍이 분화하였고, 메이지 40년대(1907년 이후)에는 수학여행까지 생겨났다. 한편, 메이지 36년(1903) 1월 31일 처음 개최된 학부모 간담회는 메이지 44년(1911) 3월 27일에는 학예회 및 학부모 간담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사들의 표면적 특징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학교로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이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찬조금을 거두거나 혹은 은밀히 촌지를 받을 목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학교를 통한 근대국가 창출이라는 메이지 지도부의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메이지 이전 시기의 일본인들은 중앙에 있는 국가의 존재를 잘 몰랐다. 에도시대(1603~1867년)의 일본 민중들은 지방의 봉건적 권력자들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중앙권력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을 새로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체제에 편입시키려면 뭔가 특별한 방식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특별한 방식이라는 것은, 학교를 매개로 지방 민중들을 중앙의 국가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배경 하에서 메이지 시기의 일선 교사들은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행사를 통해 학생과 학부모를 학교로 아니 국가로 ‘동원’하는 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새로 생긴 학예회 등의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은 은연중에 중앙집권적 국가에 통합되어 갔다. 특히 학예회 행사 중에는 국왕(소위 천황)의 칙어를 낭독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국왕 중심의 권력구조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이전 시기만 해도 일본 민중들은 오늘날처럼 소위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이 국왕 숭배에 빠진 것은 메이지 이후 교육의 영향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학교의 단체행사가 산출한 또 다른 효과는, 이것이 종래의 전통 축제가 갖고 있던 기능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무라(村, 마을)를 무대로 자체적 축제를 즐기던 일본 민중들은, 메이지 이후에는 국가가 학교를 통해 열어 주는 ‘이벤트’를 즐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라 중심의 전통적 사고에서 국가 중심의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메이지 정부의 작품인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은 전통적 생활구조에 익숙해 있던 일본 민중들을 소위 ‘천황제’ 국가 구조에 편입시키는 기능을 하였다는 것이 다카하시 사토시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식 학교문화는 일본제국주의의 대외팽창 과정에서 한국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일제의 영향과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한국의 학교문화도 일본식으로 개조되었으며, 특히 메이지유신의 신봉자인 박정희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에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학교문화의 대부분은 실상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소위 ‘천황’이 ‘국가’로 대체되는 등의 표현상의 변화만 제외하면, 오늘날 한국의 학교문화는 소위 ‘천황제 국가’ 건설을 위해 메이지시기에 시행된 일본 학교 행사와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명칭이 어떻든 간에 학교에서는 단체행사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소위 ‘천황숭배’를 위해 치밀하게 고안된 그런 행사들이 오늘날 한국의 학교에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인성과 장래를 우선시하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각종 장치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매우 소름 끼치는 일이다.
꼭 일본이어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기존의 학교문화가 최고통치자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과 국민동원의 무조건적 당연시(當然視)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시민 정서에는 부합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가슴 설레며 기대하고 준비하는 이런 행사들 속에 ‘음흉한 코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이처럼 학교문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코드가 오늘날 한국의 시대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가 학생이나 학부모를 더 이상 ‘유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강제적인 충성이나 동원보다는 자발적인 공동체 사랑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학교문화를 창출하지 못하면, 한국의 학교는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학원’에 ‘손님’을 빼앗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